One piece

 

[사보x로우]

 

 

written by. 월화비월

 

 

 

*

 

 

 

1.

 

그는 닮아있었다.’

_The story of Trafalgar Law

Bgm. 너의 기억은 눈부시다 - 143am

 

 

그와의 첫 만남은 뜻밖의 장소였다.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한 섬에 들렸던 때였다. 이 섬의 날씨는 겨울이었는지, 추위도 추위이지만 깜깜한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금은 으스스 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해군 높으신 분이 묵고 있던 섬이었다니. 어쩐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도 경계를 풀지 않더라.

 

이판사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 나는 선원들에게 그곳에 먼저 가있으라 한 뒤 미끼 역할을 대신해 마을에서 날뛰었다. 그러자 우리 중 하나라도 사고를 치는 걸 기다린 듯이 해군은 곧바로 날 쫓아오기 시작했다. 좋았다. 괜찮았다. 여기까지는 계획 대로였으니까.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해군의 시야에서 간신히 벗어난 나는 몸을 숨기고 길을 헤맸다.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이 찬 공기와 닿을 때마다 쓰라리다. 목숨을 유지하느라 급급했던 만큼 이미 몸이 지친지 오래였다. 휴식이 절실했다. 때마침 인기척 없는 골목이 나를 유혹했다.

 

어두운 그늘을 방패로 삼았다. 스르르 감기려 하는 눈을 몇 번이고 뜨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더 이상은 이성이 피곤을 버티기 힘들었다. 여기서 잠들면 꽁꽁 언 시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만 의식을 잃고야 말았다.

 

………이잖아!”

? 설마. 그런 거물급이 왜 여기에서 기절해 있겠어.”

이 수배지를 잘 보라고! 하트 해적단 선장의 트라팔가 로우가 맞다니까?”

 

고요함을 깨트리는 누군가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멀리 있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귀를 기울였다. 젠장. 해적 사냥꾼 놈들인가? 골머리가 아파졌다.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먼저 놈들의 위치와 인원을 파악했다. 왼편으로 두 명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옷을 보니 지긋지긋한 해군 놈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통 일반인이라면 들고 다니지는 않을 총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예 무시하고 지나칠 놈들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이 엿 같은 상황에 저절로 터져 나오는 비속어를 속으로 삼켰다.

 

아무런 관련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그 두 명과 나만 쏙 들어갈 만한 정도의 룸을 펼칠 준비했다. 그러고서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

 

흙바닥에서 조그마한 소용돌이가 치더니, 순식간에 투명한 방벽 같은 것이 우리 셋을 둘러쌌다. 내 목소리와, 이질감이 느껴지는 환경에 놀란 놈들이 금세 경계태세를 갖추고 날 노려봤다.

 

역시 트라팔가 로우가 맞았어! 너 이 자식, 지금 뭘 한 거냐!”

아아……. 머리 울리니까 소리치지 말라고. 그리고 움직이지도 마라. 네 녀석들의 심장이 내 손에서 두근두근 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내 말에 놈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심지어 한 명은 총기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 금방 지레 겁을 먹고 안색이 파래진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엄청난 실력자는 아닌 듯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나를 못 본척하고 가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그때였다.

 

, 미안. 그건 좀 곤란해.”

 

이 녀석들, 내 부하거든. 싱긋 미소를 짓고 내 공간에 상관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들어오는 금발 사내의 등장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 있는 두 놈하고는 느껴지는 분위기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젠장, 몸이 얼어붙어서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데! 범상치 않은 놈의 등장이라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애써 침착하게 얼어붙은 입술을 힘겹게 떼어냈다.

 

누구냐, 네놈은?”

그래서 말인데, 이 녀석들 그냥 보내 주면 안 될까? 우리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넌 누구냐고!”

 

내 큰 목소리에 놀랐는지 금발 사내가 움찔한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금발 사내는 다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나는 사보야.

 

혁명군에 속해있어. 드레스로자에서 스쳐가듯이 봐서 나를 알줄 알았는데기억 안 나려나?”

 

금발의 사내가 모자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검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

 

, 루피의 친구지?”

……아아. 밀짚모자야의 형인가.”

응 맞아. 있지,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 대장!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믿을 수 없는 위험인물을 본부에 데리고 가자라니요!”

맞아요, 대장. 혹시 이 녀석이 어디에 말해서 저희 본부 위치가 발각이라도 나면!”

 

녀석의 말에 옆에 있던 놈들이 까무러쳐서는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하지만 녀석은 진심이었는지 부하들에게 단호했다.

 

안 돼. 결정했어. 무엇보다, 루피의 친구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아아. 밀짚모자야의 덕을 보는 날도 있는 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춥기만 했던 이곳에 온기가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온화함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 차가운 무언가가 코에 닿더니 물이 되어 흘러 내려간다.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듯 껌껌한 먹구름으로 채워져 있던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흩날렸다.

 

어이 로우, 사랑한다!”

 

왜인지 모르게 그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분명히 위치는 다른데도, 그의 왼쪽 눈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화상의 흉터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봐.”

 

차가운 눈이 고개를 숙인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내 체온에 닿아 금방 물이 된 눈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이, 정신 차려!”

……….”

어이!”

 

그래. ……눈이.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

 

 

 

2.

 

그 역시 닮아있었다.’

_The story of Sabo

Bgm. 너의 기억은 눈부시다 - 143am

 

 

트라팔가 로우가 혁명군 본부에 온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곳곳에 난 상처로 인한 출혈과 답지 않은 탈수 증세로 기절한 놈을 몰래 본부까지 옮겨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 지금은 상처도 말끔히 다 나았고, 건강해졌지만. 안타깝게도 근처까지 와 눈에 불을 켜고 우리 본부를 찾으려고 하는 해군 놈들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탓일까, 가끔 멍 때리며 바다를 바라보는 그를 보고 있으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자기 선원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겠지.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내가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멍하니 창문 쪽에만 시선을 두고 있는 채였다.

 

그와 꽤나 오랜 시간 붙어 지냈던지라, 나는 한껏 편해진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로우. 그제야 그가 내게 고개를 돌린다.

 

무슨 생각해?”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또다. 나와 시선을 마주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곧바로 눈을 피해버린다.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이렇게 찾아오는 정적.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사실 이런 정적은 어릴 때부터 익숙했다. 에이스와 루피가 싸우고 나면 둘 다 삐져서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으니까. 갑자기 든 옛 생각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디 그럼, 해볼까.

 

톡톡.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녀석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자 놈이 고개를 돌렸고, 이내 내가 뻗고 있던 검지는 녀석의 뺨을 찌른다.

 

황당함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나는 두 팔로 배를 감싸 안고 쿠쿠쿡 웃음을 빵 터트렸다. , 진짜 웃기네.

 

하아? 혁명군 No.2라는 놈이 아직도 이런 장난을 치는 거냐.”

크크큭. 야 로우, 다시 한 번 보여줘라. 네 얼굴 진짜 웃겼다고. 푸하하핫.”

그만 웃어라, 사보야.”

 

살벌하게 날 쏘아보는 통에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진정시켰다. 가끔 보면, 쟤도 귀엽단 말이야. 꼭 어릴 때 에이스를 보는 것 같아. 겉으로 강한 척이란 척은 다하고 속은 루피 걱정만 하던. 항상 내가 이런 장난을 칠 때마다 꼭 저런 얼굴을 하고는 했는데.

 

알겠어, 알겠어. , 나 지금 웃음 멈췄다?”

……….”

그러게 누가 거짓말 치래? 아무것도 아니긴. 선원들 생각하고 있었지?”

네 맘대로 생각해라.”

 

까칠하기는. ……진짜 닮았네, 에이스랑.

 

이때부터였나. 아니, 사실은 좀 더 오래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속에 감춰져 있던 내 죄책감이, 그리움이 어느새 크게 성장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통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그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시원찮은 장난을 하면서 웃고 화내고, 그렇게 떠들지 않았을까.

 

로우.”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로우. 로우. 로우……. 처음엔 무시하던 그가 조금은 애절한 내 목소리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또 뭐냐, 사보야.

 

나랑 같이 몰래 나가지 않을래?”

 

갑자기 든 충동적인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 말에 적잖이 놀란 그는 뭐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냥, 그와 둘이서 항해를 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그에게서 그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싫어?”

 

트라팔가 로우. 그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그를 통해 다른 이를 본다는 게 좀 너무하다고는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에게 못할 짓이란 걸 안다. 하지만 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좋다.”

 

그도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도, 나를 통해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니까.

 

아까 전 내가 장난을 쳤을 때 웃던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도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행동을 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눈.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과 나는 닮아있다. 그리고 그 역시 닮아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이와.

 

 

이건, 쌍방 잘못이야. 똑같은걸.

 

 

 

*

 

 

 

3.

 

붉은 꽃은 내 죄책감을 형성한 걸까.’

 

 

Bgm. 새벽 1시 43분 니생각에 잠못드는 - 143am

 

 

이른 새벽 벌레들 울음이 아름답게 퍼져나갔다. 사박사박, 흙을 지르밟는 소리가 어우러진다. 눈꼬리처럼 곱게 희어진 달이 모래밭을 걷는 그들을 비췄다. 먼저 앞장서 걷던 금발머리 사내의 발걸음이 멈춘 건 절벽 뒤에 숨겨져 있는 한 커다란 배의 앞이었다. 그는 가볍게 점프해 배에 탑승했고, 이내 그물처럼 된 밧줄을 내렸다. 그의 뒤를 따라온 남자는 그 밧줄을 이용해 저 역시 배에 올라탔다. 흥흥―♪. 남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돛을 올리는 사내의 뒷모습을 그저 뚫어져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이렇게 멋대로 나가버려도. 남자의 목소리엔 걱정이 담겨있었다. 사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다시 또 찾아오는 정적. ―――시선이 맞닿는다.

 

아무튼, 사보야. 나는 너만 믿고 가는 거니까 알아서 잘 데려다 달라고.”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에, 사내는 멋쩍은 듯 쓰고 있던 모자를 더 푹 눌러써보였다.

 

……그래, 로우.”

……….”

걱정 말라고, 선원들이 있는 곳까지 잘 모셔다 드릴 테니.”

 

 

―――아아. 오랜만의 풍경이구나. 푸르른 초원 위에 누워있는 우리 셋. 개구진 웃음을 한가득 얼굴에 머금은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신나서는 이를 훤히 드러내고 에이스와 저의 손을 꼭 붙잡은 작은 아이. 나의 동생, 그리고 그의 동생 루피. 루피. 루피……. 못난 형 때문에 혼자 에이스를 지키려 애쓰다 많이 고생했을 나의 소중한 동생. . 힘없이 놓이는 나의 손. 그들과 나는 점점 멀어져 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들은 나이를 먹고 있었다. 두 손을 꼭 붙잡은 형제는 어느새 다 자라서 서로의 손을 놓아버린다. 나중의 만남을 기약하고 먼저 바다로 떠나는 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팔이 빠지라 흔들어대며 배웅하는 동생. 그리고 이내 찾아온 어둠. 그 어둠 속에서는 다시 작아져버린 아이가 홀로 울고 있었다.

 

계속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 작은 아이의 모습과 다 성장한 아이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여전히 조금씩 멀어지는 거리에 가까이 가서 위로도 못하는 스스로가 원통하다. 깜깜하기만 하던 세상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 루피의 몸을 지지대로 삼은 듯 칭칭 감아 성장하던 그 꽃은 날카로운 가시로 소년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가시가 찔러지는 곳곳마다 빨간 피가 방울 맺히고 튀어나오면 그 꽃은 그걸 영양분으로 삼아 흡수시켰다. 그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던 어느 시점에, 꽃 자체에 빨간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점점 붉은빛으로 빛나던 꽃은 펑 하고 공기 중으로 날아갔고, 흩날리던 꽃잎들 사이로 루피의 품에 안겨있는 에이스가 보였다.

 

결국 사보는 울음을 터트렸다. , . 입을 꼭 틀어막은 손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갔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루피. 미안해, 에이스. 너희를 잊어버려서. 도우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루피의 품에 안겨있던 에이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영원히 감겨있을 것만 같던 그의 눈이 천천히 떠진다. 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사보는 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점점 멀어져만 갔던 거리도 어느새 훅, 그들과 가까워져 있었다.

 

에이스의 몸통 정중앙이 크게 그을려서는 뻥 뚫려 있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무언가가 바뀌었을까. 사보는 더 이상 괴로움을 버틸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결국 휘청거리던 사보는 다시금 눈을 떴다. . 이내 탄식한 사보의 눈동자는 크게 일렁였다. 제 어깨를 꼭 붙잡고 무슨 말을 건네려는 에이스의 모습에 사보는 눈물을 멈추려 애썼다. 들어야 해. 들어야만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아아아악!!!!!!”

 

번쩍. 하지만 그 결심이 무심하게도, 저를 필요로 하는 그의 비명에 꿈에서 깨버렸다. 분명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 속을 우겨오는 답답함에 사보는 제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헤집었다. 현실에서도 울었는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슥 닦고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서 가야지. 내 도움이 필요할 그가 있는 곳으로. 빛바랜 사보의 눈동자가 그가 이미 많이 지쳐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

 

 

 

4.

 

꿈을 꿨다. 네가 그 사람처럼 죽어버린 꿈.’

 

 

Bgm. 새벽 1시 43분 니생각에 잠못드는 - 143am

 

 

시야가 흐리다.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은 듯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새하얀 곳.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친다. 하늘에선 쉬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가 걸을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가 가는 길 앞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그는 그 발자국에 제 발을 갖다 대어 보았다. 저의 발보다 한참 작은 걸 보니 아무래도 어린아이인 것 같았다. 평소에는 당연히 안 따라갔을 그 길을, 그는 충동적인 호기심에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이 세상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꽤나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는 쿵, . 무겁게 뛰어대는 가슴에 손을 가져다 놓고는, 침을 꼴깍 삼켜냈다. 이 발자국의 끝에, 무언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자국이, 끊겼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미 저가 도착했을 땐 상황이 모두 끝난 뒤인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건가. 그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새하얀 곳이었다. 땅도, 하늘도, 하얀 곳이었다. 그런데 빨갛다. 유독 저 부분만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붉은색은 주위를 물들이듯 조금씩 퍼져나갔다. 점점 심장의 속도가 빨라짐을 느끼며,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저를 여기까지 안내해주던 그 발자국의 주인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눈을 살살 치워보았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리운 모습에 점점 차오르는 눈물을 억제하기가 힘들다. 다시는 떠지지 않을 두 눈이 굳게 감겨있는 걸 봤을 때, 그는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몸이 얼음장처럼, 아니 얼음장보다 더 차갑다. 약간 곱슬거리던 금발 머리카락은 빳빳하게 굳어져,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부스러질 것만 같아 만지기 조심스러웠다.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행복하다고, 이 사내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에 그가 머리를 짚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역겨움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 더 이 사내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사내의 왼쪽 눈 밑엔 짙은 남색의 문양이 날카롭게 그려져 있었다. 자신이 그와 이 사내가 닮았다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웃음과, 이 문양. 그의 오른쪽 눈에 있는 화상의 흉터가 꼭 이 사내의 문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오른쪽 흉터?

 

우욱.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극심한 헛구역질을 몇 번이고 했다.

 

―――오른쪽? 오른쪽 흉터가 맞아¿ 맞는 거냐? 왼쪽이, 아니었나¿ 왼쪽, 왼쪽? 오른쪽¿ 왼쪽? 문양은, 오른쪽이라고? 왼쪽이 아냐¿ 오른쪽? 그럼, 지금, 이 녀석은? 뭔데? 이 녀석, 누구야? 누구지¿ 누구? 누구냐고¿!

 

, 아아! 아아아―――――――!!!! 원인을 알 수 없는 흐느낌이 퍼져 나갔다. 덜덜, 몸이 떨리고 있었다. 시선 역시 같았다.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동공에 그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 세게 문 아랫입술이 터져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오른쪽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아니었다. 왼쪽이다. 코라손이 아니었다. 지금 이 차갑게 식어있는 몸은, 그와 닮았다 생각했던 ……사보였다.

 

 

……. 로우! 괜찮은 거야? 식은땀 좀 봐. 저를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깬 로우가 번쩍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숨을 급히 들이마신 로우는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새하얗지 않다. 꿈에서, 악몽에서 깬 거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몸에 로우가 떨림을 멈추려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너 진짜 괜찮은 거야?”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운 말투로 제 두 볼을 잡고 시선을 마주하게 하는 사보에 로우가 그저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다른 데로 가있는 로우에 사보가 크게 한숨을 내셨다.

 

로우!”

 

결국 제 이름을 크게 부르는 사보의 외침에 정신을 붙잡은 로우가 그때야 사보와 저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움찔,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사보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차가운 벽에 등이 맞닿아진 터라 더 이상 뒤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사보는 로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채 말을 이어갔다.

 

말해줘. 어떤 꿈을 꿨는지.”

……….”

널 슬프게 하는 게 뭔지.”

 

그의 진지한 눈빛에 로우가 입술을 꾹 물었다. 꿈속에서 본, 상상하기도 싫은 그의 모습을 떠올린 로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악몽을 꿨다.”

……….”

네가 그 사람처럼 죽어버린 꿈.”

 

 

 

*

 

 

 

5.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거야.’

 

 

Bgm. 그날의 너, 눈부시던 햇살 - 143am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죽다니?”

 

사보의 의아한 물음에 로우가 자조를 지었다. 눈물을 머금고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안쓰럽기만 하다.

 

사보야. 너는 그 사람과 닮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너를 통해 그 사람을 보고 있었지.”

……로우.”

그런데, 오랜만에 꿈속에서 그를 봤어. 눈 속에 파묻혀서는, 차갑게 식은 몸으로 말이지.”

 

로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런데. 그가 아니었다. 바로, 너였다.”

 

―――꽤나 충격적인 말에 사보는 순간적으로 몸을 달싹였다. 그랬구나. ……많이 괴로웠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사보는 곧장 로우를 제 품에 넣었다. 저가 등을 천천히 토닥이자 진정이 되는 듯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로우의 몸이 안정을 되찾아갔다.

 

로우. 귓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그가 움찔하며 더욱 사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 어느새 사보의 등을 꼭 끌어안은 로우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러자 사보가 푸스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어디까지나 로우의 반응이 귀여워 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마치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고 길가를 헤매다 그리워하던 어미를 찾고 앞으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것 마냥 제게 꼭 붙어있는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잠깐, 사보야?”

 

사보가 로우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그를 제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로우가 당황한 듯 반사적으로 사보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사보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얼굴보다 먼저 반응해 화악 달아오르는 그의 귓바퀴가 사랑스럽다. 그래. 로우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에이스와 닮아서가 아닌, 그저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사보는 살며시 로우의 귀에 입을 맞췄다.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며 덜컥 제 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그. 사보는 함소한 채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그가 아니야.”

………물론, 그도 내가 아니고.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까, 사보. 스스로를 죄책감이란 틀에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문득 머릿속을 울리며 연달아 들려오는 그리운 이의 목소리에 사보의 눈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사보야? 로우가 코앞에서 보이는 사보의 눈물에 깜짝 놀라 당황해서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보의 눈동자 속에 비쳐야 할 저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기운이 로우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사보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렇게 한동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로우가 사보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때, 결국 사보의 눈에서 투명한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데 심지어는 이내 푸흐, 하는 웃음소리마저 들려온다. 지금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큼이나 가까이에서 본 사보의 미소는 정말로 ……예뻤다.

 

추위와 불안에 꽁꽁 얼어붙었던 무언가가 화아악, 하고 스르르 녹아내리면서 따스한 온기가 몸 중앙부터 천천히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것은 그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뜨거워졌다. 심장 고동소리가 최고조로 뜀박질한다. 사보가, 다시, 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다 느껴질 정도에,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입술을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닿아버릴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보는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눈을 뜨면 그가 보였고, 눈을 감아도 그가 보였다. 더 이상 죄책감의 잔해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다였다.

 

그래. 이미 좋아진 거면서. ‘그리워하는 이와 닮아있는 사람하고는 멀어진지 오래면서. 트라팔가 로우. 이미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거면서. 나는 왜, 지금까지 그걸 부정해왔나. 사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곧장 그의 입술에 저의 입을 맞췄다.

 

제 입술로부터 느껴지는 말캉한 것에 잠시 당황하던 로우는 이내 자신도 눈을 감았다. 뒷머리에 닿아있는 차가운 벽이 저의 뜨거운 온기를 식혀주고 있었으나, 그건 결국에 소용없었다. 곧바로 제 두 볼을 잡고 더욱 깊숙이 입맞춤을 이어오는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뜨겁다. 입술도, 그가 잡고 있는 볼도, 조금씩 스치는 팔, 몸통 할 것 없이 모두 다. 전부 그로 인해 달궈지는 거였다. 코라손이 아니다. 가슴 깊숙한 곳부터 응어리져있던 게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답답함이 모두 해소되는 시원한 느낌……. 눈이 스르륵 떠진다. 그가 내게서 멀어졌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하게도 둘 다 눈물을 조금씩 머금고 있는 상태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사보였다.

 

난 그가 아니야. 내가 그 사람처럼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두려워하지 마.”

그래.”

사실 나도 너를 누군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이렇게 보니 우리 정말 똑같지.”

……그래.”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거야.”

 

로우가 사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눈만 깜박였다. 그러자 사보가 훤히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 로우의 이마에 약하게 딱밤을 때리며 그가 말했다.

 

비슷한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해주자고, 바보야.”

……난 바보가 아니다, 사보야. 그런 소린 너한테 처음 듣는다.”

 

로우가 불만이라는 듯 이마를 한 손으로 문지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 아무렴 어때. 사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로우의 머리를 헝클였다. 어이, 잠깐만! 로우가 참고 있다가 점점 심해지는 손놀림에 발끈할 참이었다.

 

사랑해, 로우.”

……지금 뭐.”

 

싱글벙글. 당황스러워 버벅거리는 저의 말에도 그저 방긋방긋 웃고 있는 그가 얄밉기만 하다. 웃는 얼굴엔 침도 못 뱉는다더니, 이게 딱 그 상황이었다.

 

사랑한다니까?”

…….”

? 안 들려. 뭐라고?”

나도. ……사랑한다고, 했다.”

 

사보의 눈을 피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리듯이 대답하는 로우에 사보가 결국 웃음을 빵 터트렸다. 푸하하, 진짜 웃겨. 사보가 고통스럽다는 듯 배를 감싸 안고는 말했다.

 

 

어느새 깊은 밤의 어둠은 걷히고, 아침의 밝은 해가 떠오른 후였다. 푸르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배. 그 배에서는 두 사람의 행복하다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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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