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Pan
―야가미 타이치 X 타케노우치 소라
written by. 월화비월
*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안녕은 떠난다는 뜻이고,”
“……….”
“―떠난다는 것은 잊혀져버린다는 뜻이니까.”
지금의 안타까움 속에서도 나는 그의 말에 순응하지 못했다. 진득함을 뽐내던 아카시아 향은 어느새 중후한 공기 속,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애절한 시선을 한 몸에 듬뿍 받으면서도 나는, 그랬다.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거운 죄를 진 듯 고개를 숙이고서. 잘 움직여지지를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냈다.
“안녕.”
내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의 끝, 나는 결국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끝까지 너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하고서, ―나는 뒤돌아섰다.
*
―01_피할 수 없는 인연의 끝, 우리는 마주했다.―
어느 때와 다를 것 없던 학교 등굣길이었다. 하품을 찍찍 내뱉으며 나는 평소와 같이 길을 걸었다. 지루한 아침, 주위는 학생들이 서로 친구들과 떠들며 가느라 시끌벅적했다. 정말, 항상 같은 아침의 일상이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내 신경은 몇 배로 예민해져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빠르게 떨어졌다. 놀란 숨을 내뱉으며 나는 내 어깨를 잡은 이를 확인했다. …야마토.
아, 미안. 많이 놀랐어? 평소와는 다른 내 반응에 오히려 그가 더 당혹스러운 듯 보였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건네는 야마토에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오늘따라 신경이 예민하네. 한동안 우리 둘의 어색한 공기가 지속되는 듯싶었지만, 이내 야마토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오늘, 새 학기 시작이네. 벌써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이라니, 믿어져? 야마토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점점 늙는 기분이야. 이제 갈수록 파릇파릇함은 사라지고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 늙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입술을 툭 내밀고서 불만을 토로하니 야마토가 웃음을 참으며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늙는 게 뭐 어때서 그러냐.
“그럼 넌 늙어가는 게 좋아?”
“음, 글쎄. 너랑 같이 늙는 거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참나. 너 요새 왜 이렇게 능글맞아 졌어?”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가고 있을 무렵, 야마토는 피식, 공기 빠진 웃음을 토하며 내게 물었다. 그럼 넌 왜 늙는 게 싫은데?
“야. 늙는 건 당연히 싫지. 나이 먹는 게 왜 싫으냐고 물어라, 멍청이.”
“그래그래. 나이 먹는 게 왜 싫어?”
“그야―.”
어른이 되는 거잖아, 곧 있으면. 나는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워. 이기심에 취해서는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는 것이 싫다고 한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고, 나는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잖아. 내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하자, 야마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야마토는 흐음, 하는 탄식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내게 말해왔다.
“하지만, 소라.”
“…뭐.”
“그건 네가 변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해오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내가 과연 이 험난한 세상을 살면서 변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당당하게 “응, 변하지 않을 수 있어.” 라는 대답 따위는 목구멍에 틀어 막혀 나오지 않았다.
야마토의 물음에 한 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내 현재와 미래,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이어갈 나의 소중한 인연들, 나의 꿈, 사랑. 어떤 것 하나도 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깊은 고뇌에 빠져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걸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나는 결국 천천히 걸어가던 앞사람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꽤나 세게 부딪힌 탓에, 얼굴이 얼얼할 정도였지만, 이것은 아픔뿐만이 아닌 창피함의 붉어짐이었다. 급하게 죄송하다 사과하며 얼굴을 들었다. 타이밍 좋게도, 벚꽃은 그와 내 사이를 지나 내 손등에 툭, 떨어졌다.
“…드디어 만났네.”
현란하게 주위에 내리 오는 아름다운 벚꽃 잎들을 맞으며 우리는 마주했다.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소년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낯익고, 그리운 냄새가 소년에게서 흘려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콩닥콩닥, 뛰는 심장에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더랬다. 한동안, 소년의 시선을 함께 마주보며. 그저 새로운 인연이 생겨나는 순간일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
―02_털어내지 못한 그 미련 속에, 끝내 너의 손을 붙잡지 못하였다.―
난 야가미 타이치. 잘 부탁해. 그 의미모를 소년을 다시 마주한 건 교실이었다. 고등학생 2학년, 새로운 교실. 그리고 소년. 이것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내게 말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 오는 소년을 그저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의 손을 쭉 뻗으며 악수를 청하는 소년에게, 나는 악수를 받아주지도, 그렇다고 소년을 무시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멍하니, 소년을 바라봤다. 오묘한 느낌이었다, 소년은. 나를 홀릴 것만 같은 소년의 깊은 눈동자는 무언가 많이 슬퍼보였다.
악수, 안 받아 줄 거야? 내밀고 있는 손이 민망한지 소년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소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아, 이런. 지금 내 얼굴은 창피함보다 더한 쪽팔림에 붉게 물들여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등신같이, 한 손으로 악수하면 될 것을 왜 당황해서는 두 손으로 잡은 거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였다. …잘 부탁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말하는 것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소년은 두 눈이 휘어지도록 환히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년의 미소가 행복해보이지만은 않는 다는 건 오늘따라 예민한 나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보고 싶었어, 소라.”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애절해 보였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소년하고 친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야마토와는 다른 반이 되어 떨어져 버렸지만, 신기하게도 소년과 나, 야마토는 어디를 가든지 셋이서 붙어 다녔다. 우리와 함께 떠들며 웃고 있는 소년이었지만, 소년에게는 왠지 모를 동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함께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소년은 가끔씩 슬픈 미소를 보였다. 왜 그런 건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야마토에게 이것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지만, 야마토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 할 뿐이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잖아?”
항상 같은 대답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맞는 말인데, 왜 그 말에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욱신욱신 거리는 마음에 나는 가슴 언저리에 두 손을 꼭 갖다 대었다. 타이치, 그 아이가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괜히 드는 미안한 감정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느새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있을 여름 방학식에, 나는 들뜨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방학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실실 웃자, 소년이 내 머리를 툭 건들며 말했다. 웃지 마, 정들어. 소년의 말에 옆에 있던 야마토는 비웃음을 내며 나를 놀리기에 동참했다. 못생겨서 정들지. 그들의 말에 나는 볼을 부풀리며 길을 앞서 걸어갈 뿐이었다. 따라오지 마! 기분 좋았던 하굣길이 한 순간에 망쳐지는 순간이었다. 아아, 정말. 저것들은 날 놀리는 데에만 도가 탔지.
“타이치 오빠!”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녀의 부름에―물론 나를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절로 걸음이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도니, 소년이 소녀에게 꾸중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데 그러지? 나는 호기심을 찾지 못하고 소년에게 물었다. 타이치, 이 여자애는 누구야? 내 물음에 소년이 움찔거리며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소년의 뺨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너, 괜찮아? 땀을 닦아주려 소년에게 손을 뻗는데, 당황한 소년이 내 손을 내치었다. 어색한 공기가 더운 여름 공기와 함께 우리를 덮었다.
…미안. 세게 쳐서 그런지, 내 손등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것에 엄청 큰 죄를 진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쩔쩔 매며 사과를 하는 소년이었다. 아, 괜찮은데. 어색한 미소를 입에 걸치며 사과하는 내게 소녀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기,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니? 내 상냥한 물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난 언니가 싫어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싫다고 말해오는 소녀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이 아이를 처음 보는 것이 분명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애에게 싫은 짓을 해 버린 것일까? 당혹스러움에 나는 두 눈만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빠. 이번이 마지막인 거 알지?”
“…알았다니까. 집에서 얘기 해, 히카리.”
“이제 8월 1일까지 일주일 남았어. 그 뒤로는 없어.”
“알았대도!”
“―내가 언제까지 오빠가 이 짓거리 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미 다른 사람들은 오빠를, 그리고 나를 잊고 잘 살고 있는데 오빠는 대체 왜 거기서 벗어나지를 않은 거냐고! 소녀의 울분 가득한 외침이었다. 알 수 없는 남매의 대화에 나는 끼어들지 못했다. 그저 방관자가 되어 소년과 소녀를 지켜보았다. 야마토 역시 그랬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야마토의 얼굴에 나는 몸이 경직된 채로 서 있어야만 했다. 미안, 먼저 갈게. 소년이 소녀를 억지로 이끌고 가는 순간에도 나는 “잘 가.” 라는 짧은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이런 내 모습에 야마토는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 그래, 소라?”
“…야마토.”
“그렇게 멍한 표정 짓지 마. 왜, 저 둘의 대화가 신경 쓰여?”
“……….”
“소라, 어른이 되는 게 싫다 했지? 그 방법 내가 알려줄까?”
“너…. 지금 이상해. 제정신 아닌 것 같아 보여.”
“죽어.”
“뭐?”
“죽으면 넌 평생 그 나이로 있을 수 있어. 어른이 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미안하지만, 난 지금 충분히 제정신이야.”
타이치, 쟤도 포기를 모른다니까. 이런 짓만 지금 몇 번째야? 어느새 웃음기를 싹 지우고서 말하는 야마토에 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걱정 마, 소라. 답답해서 한 소리니까. 진심으로 말 한 건 아니야.”
“……….”
“내가 나쁜 새끼인건 맞지만, 너도 참 나쁜 것 같아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난 하나도 모르겠어.”
“몇 백, 몇 천년동안 같은 시간대에 다들 환생을 했고, 인연을 이어갔는데 말이야. 내 이기심에 나는 항상 방해했어.”
물론, 나는 지금도 방해를 할 거야. 지금 준 힌트는, 그래도 여태껏 노력한 타이치에 대한 보상일 뿐이야.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어느새 소녀가 말했던 8월 1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좋지 않은 불쾌함이 나를 감돌았다.
…방학 잘 보내. 방학식 날, 나는 너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소년을 외면한 채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그 날의 이질감에 나는 소년이 불편했다. 야마토도, 소년도, 그리고 그 소녀도. 하나같이 내 머리를 헤집어서는 지끈지끈한 두통이 오게 할 뿐이었다. 나를 뒤 따라 와서 내 어깨를 붙잡고 거친 숨을 쉬어내는 소년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게 손을 내미는 소년은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소년이 내 눈 앞에 손을 내밀었기에 그 손만 내 눈에 담았다. 나는 끝내 소년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
*
―03_팬던트 속에 함께 미소를 짓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나는 너에게.―
8월 1일이 찾아왔다. 방학의 무료함에 나는 죽은 듯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띵. 핸드폰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한 동안 가만히 그 문구를 바라보았다. 나는 확인 버튼을 누르는 걸 망설여하고 있었다. 애꿎은 입술을 깨문 채로 나는 용기를 내어 확인 버튼을 눌렀다.
“……아.”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탄식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했다.
「빛의 언덕에서 만나.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어. 느낌대로 가면, 그 곳에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문자 내용 역시, 도통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해. 너도, 소녀도, 야마토도. 이 복잡한 관계를 왠지 내 손으로 직접 끝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빛의 언덕 역입니다. 여자의 음성에 나는 자리를 떴다. 이곳은 내가 자주 오던 곳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뭔가 익숙했다. 발걸음은 어느새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거였나, 타이치가 말 한 것이. 그냥, 느낌대로 발걸음은 익숙한 듯 걸음을 떼고 있었다.
“…타이치.”
내 발걸음이 멈춰 선 곳엔 이미 타이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를 저의 등받이로 사용한 채 드리운 그늘 속에서 소년은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오늘은 날이 평소보다 더 맑았기 때문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내리 오는 햇볕은 매우 따가웠다. 그래서 그런지 습기가 없어 그늘에 있으면 충분히 시원한 정도의 날씨였다. 물론, 원래 이런 맑은 날씨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가능성은 있었기에, 혹시나 싶어 우산은 챙겨왔다.
소년의 얼굴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좀처럼 뜨지 않는 두 눈에 기다랗게 나와 있는 속눈썹은 바람에 맞춰 조금씩 떨리며 움직였다. 나는 새근새근, 죽은 듯 잠을 자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 따가운 햇볕에 나 역시 나무 그늘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의 얼굴을 더 자세히 바라보기 위해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 아무리 봐도 몇 달 본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이 모습보다 더 앳된 얼굴로 많이 마주했던 것 같은 느낌.
…왔어? 소년이 천천히 눈을 뜨며 잠겨서 살짝 갈라진 음성을 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이 취한 포즈를 따라했다. 큰 나무를 등받이 삼아 기댔다. 오, 꽤 편하네. 나는 만족감에 살포시 웃음을 지어보이다가도 옆에 있는 소년을 의식하며 금방 정색을 해보였다. 무슨 일인데 보자고 한 거야? 내 물음에 소년은 얼굴에 잔뜩 씁쓸함을 드러냈다. 쿵. 소년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픈 표정 짓지 마. 소년의 얼굴에 내 심장이 더 저릿해왔다. 소년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 볼에 닿은 소년의 따스한 손 감촉이 좋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떠 보였다. 한동안 내 볼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소년은 힘없이 손을 떼어냈다.
“이거, 주려고 왔어.”
소년이 내게 건넨 것은 자그마한 팬던트였다. 이걸 왜? 내 물음에 소년은 팬던트를 열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달칵. 팬던트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사진 하나가 예쁘게 끼워져 있었다. 모두가 함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다는 미소를. 나는 팬던트를 눈 앞에 가까이 대어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웬 괴상하게 생긴 동물들이 사람들의 옆에 같이 붙어있었고, 그 속에는 소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사진 속에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야마토도, 소년의 동생이라던 그 소녀도. 선배인 죠, 후배인 코시로, 미미, 야마토의 동생인 타케루…. 나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이런 장소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이 괴상한 생명체의 정체도 알지 못했다. 혼란스러움이 한 번에 내게 찾아왔다. 어질해오는 머리를 간신히 손으로 짚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게, 뭔데?
“오늘이 마지막이래, 소라.”
“타이치, 지금 이게 무슨….”
“디지털 월드에서 피요몬은 아주 잘 있어. 다른 애들도 잘 있고.”
“……….”
“널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해. 네 행복을 항상 바라고 있어.”
피요몬이란 이름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어. 전혀, 전혀 모르겠어. 답답한 가슴을 나는 몇 번이고 두드렸다. 꺼이꺼이 뱉어지는 울음을 쏟아내어도 내게 되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기억을 모두가 잊는다는 게 난 너무 두려웠어.”
“…타이치.”
“히카리가 계속 그만 하래. 이제 그만 나도 행복해지래. 다른 삶으로, 같이 가재. 자기는 내 동생이니까 계속 함께 있을 거라면서.”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했어. 몇 번이고 환생한 너희를 찾아가도 너희는 끝내 기억하지 못했어. 하지만 나는, 그 행복했던 기억을 잃기가 두려워. 소라, 항상 나는 너를.
“―사랑했어.”
소년은 울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나보다도 더 애처롭고, 슬프게. 내 어깨를 붙잡고 말해오는 소년에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울지 마, 타이치.” 하고 짧은 말을 건네는 것 뿐. 천천히 손을 뻗어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소년이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그 날의 기억이 지금과 겹쳐, 형상이 돼서 내 기억 속에 스며들어왔다. 계속해서 자극해오는 눈물샘을 나는 막지 못하였다. 나는 너를 버렸다. 그 날, 너를 냉정하게 내쳤다. 디지털 월드에 이상이 생겼고, 온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너는 그대로 자리했다. 떠나는 우리들을 붙잡지 않은 채, 세상이 온전해질 때까지, 너 혼자서 지금까지. 아니. 히카리도 함께.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과뿐이었다. 너를 믿지 못했어. 네가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새로운 삶은 살면서, …몇 번이고 이렇게. 소녀가 나를 미워할 만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마 소녀에게 우리들은 전부 증오스러운 인간이겠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세계를 위해 오로지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지금까지 버티고, 버텼을 소년과 소녀에게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이제 가, 소라.”
“……….”
“하지만.”
안녕이라고는 하지 말아 줘. 이제 나를 떠나지 마, 잊히는 건 싫어. 소년의 말에 나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말은 하지 않을게.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지, 발갛게 부운 두 눈을 휘어 접으며 소년은 말간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소년을 따라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또 보자, 타이치.”
내 말에 소년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눈을 휘둥그레 떠서는 나를 바라보던 소년은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제 품에 쏙 넣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내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자, 소년은 더욱 나를 꽉 껴안았다. 내 목덜미에 저의 얼굴을 파묻던 소년은 작게 말했다.
“넌 나에게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의미 있어.”
그래서 내가 몇 번이고 너의 환생을 기다리고, 기다릴 수 있었던 거야. 나를 제 품에서 떼어낸 소년은 다시 한 번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년의 웃음이 처음으로 슬퍼 보이지 않고,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였기에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태양. 소년의 웃음은 마치, 태양과도 같았다.
내 손에 다시 한 번 저의 팬던트를 꼭 쥐어주던 소년은 내가 눈을 감았다 뜬 사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시원한 여름 바람과 함께, 소년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있었다. 반 년 동안 꿈이라도 꾼 건가 싶었지만, 내 손에 꼭 쥐어져 있는 팬던트는 소년이 이곳,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 하나의 흔적이었다. 하나도 남기지 않은 줄 알았더니, 이거 하나 남기고 갔네. ―비는 그 뒤로도,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오늘 밤의 별은 유독 밝았다. 달칵. 아름답게 밤하늘을 비추는 별을 바라보며 나는 팬던트를 열어보았다.
팬던트 속에 함께 미소를 짓고 있는 우리에 모습에, 나는 너에게. 너를 생각하며 그 말을 읊조렸다.
―넌 나에게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의미 있어.
*
“넌 나에게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의미 있어!”
“You mean more to me than anything in this word!”
―Fin_피터팬, 어느새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Subtitle : Behind story_피터팬과 웬디, 팅커벨, 후크의 관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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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제목을 다 합치면 피털(터)팬.
- 피터팬=타이치 웬디=소라 팅커벨=히카리 후크=야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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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2015.08.08)
*수정(201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