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게 하나 없는 날이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놈을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 날 역시 멍청이 같은 짓을 하는 녀석의 목에 팔을 두른 채 힘을 주었다. 문득, 선선한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덥다.’ 고 생각했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더위가 온몸을 감싸며 피부를 발갛게 물들인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내 귓전을 둥둥 울렸다. 생소한 느낌이 낯설어 적응하지 못한 몸에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같지 않다. 이미 평소하고는 무언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아. 정신이 혼미하다. 녀석이 내게서 빠져나오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고갯짓을 할 때마다 놈의 머리카락이 내 목을 간질였다. 오이카와와 꽤나 어울리는 청량한 샴푸 향이 코를 자극했다. 동시에 온몸이 탁, 하고 힘이 풀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이 내게서 빠져나왔다.
놈이 나를 바라보며 브이자를 그리고 웃고 있다.
벚꽃을 닮은 웃음이었다.
크게 바람이 불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벚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한창 벚꽃비가 흩날리던 그때, 내 뺨에 벚꽃이 스쳐 지나가며 연분홍으로 물들어갔다.
내 생에 첫 봄을 스스로 자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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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st_design 님 커미션입니다.
隻愛_척애
Oikawa Tooru X Iwaizumi Hajime
written by. 월화비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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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기 자신 보다 배구를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목표를 잡은 건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는 그런 독한 끈기를 가지고 있었기 태문에 오버워크를 할 때가 종종 있어서 이런저런 골치가 아니었다. 다치는 건 기본에, 가끔씩은 정말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별의 별 일이 일어났다. 당연히 아주 오래전부터 녀석은 내게 ‘망할 바보’ 라고 굳혀질 수밖에.
그래, 망할 바보. 쓸데없는 바보지만 때때로는 믿음직스러운 놈이라고.
오이카와 토오루는 내게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또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인연의 끈을 나누고 있는 녀석이기에. 더욱 녀석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오이카와를 보면 저도 모르게 떨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평소처럼 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노력이 조금은 통한 걸까, 나날이 갈수록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은 재가 되어 흩어져갔다. 그러나 남은 잔해들은 가슴을 꽉 막히게 했다. 숨이 막혀와 괴롭다. 괴롭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만 했다. 아마, 그 잔해들은 친구를 좋아한 내게 내리는 벌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쨩―.”
녀석에게 나는 ‘친구’ 그 이상은 될 수 없을 테니까, 어서 포기하라고 하늘이 내게 주의를 주는 벌. 이 인연을 깨어서는 안 된다고 콱 막힌 가슴에서 통증을 내며 속삭여왔다.
*
학교 측 사정으로 오늘은 부 활동을 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라는 공지가 내려졌다. 안 그래도 조금 피곤했는데 잘 됐다 싶어 내심 속으로 안도하며 짐을 챙겼다.
지이익. 가방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어깨에 매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교실문이 열린다.
온몸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저릿하고 느껴지는 전율에 너라는 걸 알았다. 어느새 네게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었구나, 라는 사실에 놀랍기도 잠시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처음 맡는 낯선 향수 냄새였다.
네가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미소를 짓는다. 이와쨩!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에 가슴이 떨렸다.
오이카와는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문득 오늘 하루종일 같이 있었는데도 날 저리 반겨주는 네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악. 얼굴이 달아오른다. 숨겨야했다. 재빠르게 녀석이 있는 곳에서 반대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너였냐.”
후. 녀석 몰래 작게 숨을 내쉬며 심장을 진정시켰다. 역시 놈을 안보는 게 정답이었다. 화끈거리다 못해 새빨갛게 색칠됐던 얼굴이 다시 제 색으로 되돌아갔다.
오이카와는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제 턱을 쓸어 만지다 까먹을 뻔 했다는 듯 “아.” 하는 작은 탄식과 함께 제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제 두 눈을 반달처럼 곱게 접은 오이카와가 매혹적인 눈웃음을 띠고는 내 두 손에 제 손을 마주잡고 깍지를 껴왔다.
한 순간 사고를 내려야하는 뇌가 작동을 정지했다. 온 몸이 굳는다. 주뼛주뼛 놈의 시선을 어떻게든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아, 녀석이 잡은 두 손에 땀이 꽉 차 금방이라도 뚝, 뚝 흘러내릴 것만 같다.
“이와쨩, 혹시 어디 아파?”
흐음. 녀석이 작게 신음하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뭐지 이 새끼,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가.
금방이라도 얼굴이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다. 정신이 혼미하다. 녀석의 냄새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간간히 맡아지는 낯선 향수냄새 때문이겠지.
나는 잡혀있던 손을 빼내어 오이카와의 머리를 쭉 밀어 내게서 떨어지게 했다.
이제, 환상에서 깰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몸 상태 별로라서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네놈이 지금 방해하고 있잖아. 대체 용건이 뭔데, 망할카와.”
“아, 맞다. 순간 또 잊어 버렸네. 들어와!”
……누구를 부르는 걸까. 심장이 불안함에 흔들렸다. 드륵, 하고 열리는 문소리가 왜이리 날카롭게만 느껴지는지. 소리가 바늘이 되어 가슴을 콕콕 쑤셨다.
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우물쭈물 거리며 오이카와의 옆에 철썩 달라붙어 섰다. 그녀에게서는 아까 오이카와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향수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너구나, 향수의 주인이. 내 시선이 차게 식어갔다.
너의 옆에 다른 이가 서있다. 아니, 너의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서있다.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너를 보니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 가까운 책상을 짚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향수냄새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너를 무시하고 집에 가는 거였는데. 나는 대체 어떤 희망을 품고서 방금 전까지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에 설레어했는가.
여러 가지가 섞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아쳐와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가 힘들었다.
지금 오이카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들리지가 않아.
놈의 입모양에 집중하고 있으니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그래서, 이와쨩한테 가장 먼저 소개시켜주고 싶었어!”
이와쨩? 아무 반응이 없자, 무언가 내 상태가 이상함을 감지한 놈이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나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다 그만, 책상다리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듯 넘어진 나는 저릿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작게 신음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잠시 행동을 멈춘 오이카와가 얼굴색이 급격하게 변하더니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며 다가왔다. 나를 일으키려고 놈이 내 쪽으로 손을 뻗는다. 곧이어 가차 없이 놈의 손을 쳐낸 나는 바닥과 책상을 번갈아 짚었고, 일어섰다.
내게 거절당한 게 충격이 큰 듯 오이카와가 글썽이며 바로 뒤에 있던 여자에게 폭삭 안긴다. 아아, 정말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속이 뒤틀려서 울렁거리는 게,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토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참아야지. 숨겨야지. 그래야겠지. 애써 망가져버린 마음을 달래며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어보려 할 때였다.
“아, 안녕. 그……, 이와이즈미군……. 미안, 토오루가 오늘 꼭 나를 너에게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해서.”
계속 내 눈치를 보던 여자가 여전히 안겨있는 놈을 토닥이며 어색하게 눈웃음을 짓고는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나, 방금…… 처음 보는 애 앞에서 그렇게 모양 빠지게 넘어졌던 건가……. 조금 창피함이 몰려왔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망할카와가 문제였던거지 네가 왜 사과를 하냐.”
“그렇다면 다행이고! 난 토오루의 여자친구 ――라고 해.”
“……그래, 망할카와―, 아니, 오이카와한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난 이와이즈미 하지메라고 한다.”
………‘여자친구’라. 확인사살을 당하듯 명확하게 들려오는 저 말이 왜 이리 아픈지. 꼭 저 여자애가 자기 애인한테 딴 마음 품지 말라고 경고를 주는 것만 같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어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그래! 내 여자친구는 누구보다 가장 친한 이와쨩한테 먼저 소개해주고 싶었단 말이야! 그런 이 오이카와상의 마음도 모르고, 이와쨩은 정말 멍청이라니까.”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내가 왜 좋아해도 저 녀석을 좋아해서는. 살짝 억울해져서 괜히 오이카와 놈을 째려봤다. 놈과 눈이 마주친다.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의 얼굴이 당혹함으로 가득 찼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얼굴이 잿빛이 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왜 그러지. ……지금 얼굴 쪽이 축축한 것이, 나 울고 있는 건가.
“이와쨩. 왜 그래, 진짜 어디 아파?”
“이와이즈미군, 괜찮아?”
고개를 돌려 팔로 눈을 벅벅 닦았다. 이와쨩, 여기 봐봐.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오이카와가 계속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괜찮았다. 정말 갑자기, 그냥 순간적으로 여러 감정이 뒤섞여서 조절하지 못한 것뿐이었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였다. 괜찮아지려고 했다. 오이카와가 내 두 팔을 붙잡고서, 억지로 저와 얼굴을 마주하도록 하게하기 전까지는. 아마, 내 얼굴은 엉망진창이었을 게 분명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놈의 입에서 오랜만에 내 풀네임이 나온 걸 보면.
그 후로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가방 끈을 붙잡고 횡설수설하며 급하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계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움에 몇 번 헛구역질을 하면서.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고 있는 와중에도 쨍쨍한 해에 온 몸에서 조금씩 땀이 흘러 내렸다. 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기 위해, 주머니에 휴지가 있나 뒤지던 나는 그만 포기하고 손으로 눈을 닦았다. 땀이었다. 한 여름을 알려주는 매미 소리가 내 울음을 덮어씌운다.
봄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여전히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너에게 봄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제 전부 다 끝났다. 놈을 좋아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 계절은 이제 가을이 되고, 차디 찬 겨울이 되겠지.
“이와쨩!”
내 이름을 크게 외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돌려 그곳을 쳐다봤다. 오이카와였다. 쏜살같이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를 쫓기 위해 힘차게 달렸던 건지, 너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엇을 물으러 온 걸까. 대체 뭣 하러? 나는 네게 대답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시원하게 울고 나니 울렁이던 감정들이 진정돼있었다. 나는 아예 몸을 돌려 녀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녀석 역시, 숨을 제대로 고르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여전히 녀석의 시선에 떨리는 가슴이 원망스럽다. 아, 정말로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후회한다.
애초에 녀석에게 봄이 오기 전에, 내게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내 계절은 뜨거운 여름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이렇게나 뜨겁다가도, 차가운 비가 내리는 여름이 되지 않았을 거였다.
―봄이 오지 않았다면. 봄이 오지 않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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