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Written by. 월화비월
***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볼에 맞닿은 눈은 내 체온 탓인지 금방 물이 되어 흘러내려갔다. 나는 어서 팔을 들어 옷소매로 볼을 훔쳤다. 누가 보면 꼭 우는 거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하ㅡ. 내뱉은 숨이 뿌연 안개처럼 잠시 공기 중에 머물다 그만, 이내 모습을 감췄다. 계절적으로 한겨울인 이곳은 지금.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화산재로 뒤덮인 것처럼, 잿빛으로 까마득한 하늘에 나는 무심코 그만, 지금이 대낮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뻔했다. 어제저녁부터 구름이 몰리더니, 눈이 올 징조였나 싶다.
‘―쿠로사키 넌, 현세에서의 미련을 버리고 이 소울소사이어티에 있을 수 있는 건가.’
어느새 눈을 감고 가만히 수 없이 떨어지는 눈을 맞고 있던 나는 머릿속을 찌르듯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다. 꽤나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멈출지를 모르고 끝없이 내리는 이 새하얀 눈 탓에 그가 떠오른 듯했다. ……뭐, 딱히 눈 때문에 그가 떠오른 건 아니겠지만. 날이 날이니.
이번에는 팔을 쭉 뻗어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손바닥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눈들에 나는 그것들이 닿을 때마다 손가락을 조금씩 움찔거려야만 했다. 그저 순전히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눈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손바닥에 닿는 눈은 금세 얼마 되지도 않아서 녹았다. 녹은 눈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하니, 그때가 회상되기 시작했다. 가능한 떠올리기 싫은, 그 참혹했던 날. 나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붉은 눈이 내렸다.
은발인지 백발인지 모를 딱 초등학생 정도의 체구의 소년은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보완하기 위해 손에 꼭 잡은 참백도를 땅에 꽂은 소년의 모습은 흔히들 말하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아니었다. 끝까지 저의 긍지를 지키는 소년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가 누가 있을까.
소년의 목과 팔을 뒤덮은 얼음은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붉은 피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은 지 오래였다. 유리가 깨지는 맑은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투명한 얼음을 발갛게 물들이는 끈적끈적한 붉은 액체들……. 그와 함께 찾아오는 코를 찌르는 것 같은 쇳내는 내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자리 잡아 있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아무런 조치도 하지 못 하고 텅 빈 눈으로 그저 소년을 바라보고 있던 나. 고개를 힘겹게 든 소년의 눈과 마주친 순간, 덜덜 떨리던 몸이 석고상마냥 굳어버려선 식은땀이 줄줄 뺨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괜찮은 거냐고,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말을 해보려 입을 벌려 보았건만 정작 뻥끗 거리는 입모양과는 다르게 나오지는 않던 목소리와, 뻣뻣하게 굳어버린 두 다리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눈. 빛이 바랜 두 눈동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한동안 그 행동을 반복하던 소년은 차마 힘겨워 고개를 움직이지는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제 주위를 둘러다보았다.
저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피를 흘린 채 주위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이들. 소년이 지키지 못한, 검은 사패장을 입고 있는 그들은 나와 소년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쿠로사키.”
푹 쉬어버린 음성은 소년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그제 서야 그동안 개미만한 소리도 나오지 않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토시로,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글쎄, 토시로가 아니라 히츠가야 대장님이라니까―. 쿨럭. 윽, 말하는 것도 이젠 한곈가.”
소년의 다 간 목소리 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소년의 입가를 흐르는 피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몸으로 지금까지 서있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소년은 그때서야 몸의 긴장을 푼 건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가 만든 얼음 덩어리에 기대어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소년의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이게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긴. 소울소사이어티에서, 그것도 호정 13번대 대장 중 하나인 내가 지금 이 꼴이라는 건 적이 처 들어왔다는 소리 밖에 더 있겠냐.”
“어째서……. 그 적은 대체 어디에 있는데!”
내 말에 소년은 그저 픽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는 소년의 눈빛에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힘을 준 눈을 풀더니 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여는 소년이었다.
“지금 내가 내뿜는 영압도 못 느낄 정도니, 이 소울소사이어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야, 뻔하겠군.”
“뭐?”
“걱정 마라, 쿠로사키. 날 이렇게 만든 적은 해치웠으니. 다만, …다른 대장들도 지금 나처럼 힘들게 싸우고 있다는 것뿐이다.”
소년의 말을 다 듣고서야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던 건지 깨달았던 나는 당황함을 진정시켰다. 그제야 소울소사이어티 전역에서 느껴지는 강한 영압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는 사실들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쥔 나를 쳐다보던 소년은 잠시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가 부서지고 있는 얼음들. 조각난 얼음 잔해가 공중에 머무를 때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별빛처럼.
“쿠로사키. 내가 저번에 네게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현세에서의 미련을 버리고 이 소울소사이어티에 머무를 수 있겠느냐고 했던 말이다.”
사뭇 진지해진 소년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갑자기 이 상황에서 그 얘길 꺼내는 소년이 이해가 되지 않는 한편, 꽤나 위태위태해 보이는 소년이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가만히 경청해 들었다.
“네 힘은 이미 우리 대장들의 영압 조차도 뛰어 넘었어. 더 이상 현세에 있다가는 그들에게 영향을 줄 뿐이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그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더 이상 현세에 있으면 안 된다고. 이 힘을 얻었을 때부터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굳이 소년이 내게 말을 해주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지만 아직 나는 현실에 남은 미련이 많았다. 많았고……, 그리고……….
“역시, 너와 난 닮은 점이 많군. 쿠로사키.”
“……그 미련이랑 이 미련이랑 뭐가 비슷하냐.”
“적과 싸우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지키기만 한다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미련 때문인지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당장…….”
“누구를 부르든 소용없어.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알아. 너도 보이잖아. 부서지는 것도 모자라 녹고 있는 이 얼음들이.”
부탁이 있다. 소년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불러오는 것을 포기한 채 소년의 앞에 앉아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기력이 느껴지질 않는 소년의 눈은, 내게 참 낯설었다.
*푸른 눈이 내렸다.
예전 일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내가 가려던 도착지에 도착해 있었다. 한 허름한 상점을 가리키는 간판엔 ‘우라하라 상점’이라고 적혀있었다.
“아, 이치고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라하라상, 내가 올 거 알고 있었어?”
“이미 준비도 다 해 놓은 상태랍니다.”
윽. 이거 완전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네. 괜히 뒷목을 긁적이며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떡하니 놓여있는 소울소사이어티로 가는 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도 이제, 이곳을 들어가면 인간의 몸으로 현세에 오는 일을 불가능에 가깝겠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현세에서의 미련을 버리고―.’
번뜩. 소년이 떠올랐다. 역시 나는 망설여서는 안됐다. 발을 내딛었다.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정말, 가시는 겁니까, 이치고님.”
평소엔 볼 수 없는 우라하라상의 사뭇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딱 소울소사이어티로 향하는 문 바로 앞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우라하라상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내가 가는 수밖에 없잖아.”
“……당신이 가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계속 여기에 있어봤자, 안 좋은 영향이나 끼치기만 하고……. 소울소사이어티가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피하기만 하는 건 나답지 않으니까.”
심지어 당신도 그렇게나 다쳐서 왔잖아. 내 말에 모자위에 손을 얹은 우라하라상은 고개를 숙였다.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푹 눌러 쓴 모자 탓에 그림자에 그늘진 우라하라상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심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힘차게 발을 뻗었다. 소울소사이어티를 가기 위해. 소중한 인연이 되어버린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소년을 보러가기 위해.
오늘은, 소년이 눈이 된지 딱 1년 되는 날이었다. 다시 그 막강한 힘을 가진 적이 처 들어온 지, 딱 1년 된 날.
그날과는 다르게, 내 발걸음에선 이제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련 또한.
현세에서 마지막으로 본 눈은, 소년의 눈과 같이 푸르른 눈이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눈을 바라보며.
“부탁이 있다.”
“뭔데.”
“―미련 없는 길을 가라. 쿠로사키.”
앞으로 네가 할 선택에 후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소년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선택에 후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소년의 영압이 갈수록 재빠르게 희미해져 가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였나, 소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이유는.
그저 이제 그만 말하라고. 그렇게 소년을 닦달할 뿐이었다.
“우리는 이미 네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평범할 수 있었던 네 삶이 더 이상 평범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건 많이 미안해하고 있고.”
“이제 그만 말하라니까! 이제 토시로, 네 영압 희미하다고!”
“내가 죽을까봐 걱정 되는 건가.”
당연하지. 내 말에 소년은 자기가 말을 잘 못 한 것 같다며 웃음을 흘렸다.
“아까 말했던 미련은, 이 몸으로 하지 못 한 일이 있기 때문이야. 난 죽지 않는다.”
“하지만 너, 영압이―.”
“내 영혼은 소울소사이어티의 일부가 된다. 죽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쿠로사키, 쓸 데 없는 걱정 말고 어서 다른 사람들이나 도우러 가라. 소년의 등 떠밀음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돌려야 했던 그때.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소년의 영압이 완전히 사라졌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급히 소년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땐, 오로지 수많은 검은 사패장들 가운데에 튀는 하얀 하오리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눈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보통 알고 있는 새하얀 눈은 아니었다. ―푸르게 빛나는 눈. 나는 이내 바닥에 녹고 있던 얼음들 역시 반짝반짝 빛나는 빛이 돼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로 올라가는 눈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이라도 새어나오려 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소년, 토시로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으니까. 만약 눈물을 흘렸다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며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소울소사이어티의 전역에서 수많은 영압들이 부딪치던 것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번에는 물러난다는 듯이.
―아마, 토시로가 내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6.06.19)
*수정(201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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