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mon

*나락의 피노키오

 

 


─ 타케히카켄

 

 


written by. 허니듀 (월화비월)

 

 

 


§

 

 

 

“가지마.”


“……….”


“가지 말라고 말 하고 있잖아! 히카리, 네가 그 자식한테 가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


“그러니까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없도록, 네가 말려줘. 응?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소년이 소녀에게 매달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이 소녀에게 ‘가지 말아 달라.’ 하고 부탁했지만 소녀는 냉정하게도 잠시 멈칫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소녀가 소년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웬만한 거리가 생기자 소년은 소녀가 있는 곳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소년은 멀쩡히 가고 있던 소녀의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우고는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소녀는 그런 소년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표정 없이 소년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을 뿐. 사랑해. 소년이 소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소년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이던지 그동안 아무런 반응도, 표정도 없던 소녀는 소년의 ‘사랑해’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실소를 터트렸다. 소녀의 실소에 큰 반응을 보인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이성을 잃은 듯 소녀의 두 어깨를 팍 잡아 떨어트려 자신과 마주보게 하고는 크게 악 지르듯 소리쳤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가지 마. 그 자식한테 가지 말란 말이야!”

 

 


소녀는 소년이 잡은 자신의 두 어깨에서 고통이 밀려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의 말은 소녀에겐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결국 이성을 잃은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소녀의 뺨을 내려쳤고, 소녀의 머리는 그 충격을 참지 못하고 옆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씩씩 거리던 소년은 소녀가 빨갛게 부은 뺨을 매만지는 것을 보고서야 이성이 돌아온 건지 깜짝 놀라며 소녀에게 미안하다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해 히카리. 내가 널 때리려던 게 아니라…, 네가 계속 내 말을 무시하고 있으니까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넌 참 이기적이야.”

 

 

 

 

 

지금껏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던 소녀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소년은 소녀가 말 하자,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소녀의 말에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녀는 소년이 어떤 표정을 짓던 상관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그만 놔줘.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어, 나는.”


“…히카리, 난!”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뭐?”


“이건 집착일 뿐이야.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니야. 넌 그저 어둠에게 집어 삼켜질까봐 두려워서 나를 곁에 두려고 하는 것뿐이잖아.”

 

 

 

 

 

소녀의 말이 소년에겐 많이 충격적이었는지 소년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소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 아니야. 나는…. 소년이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고,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도 못한 채 소년은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소녀는 제 볼을 어루만지던 손을 그대로 천천히 소년의 볼에 갖다 대었다. 소녀의 볼이 자신의 볼에 닿자, 소년은 깜짝 놀랐고 여전히 흔들리는 동공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넌, 참 불쌍한 아이야. 소녀가 가엾다는 듯 소년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라고 네 스스로를 세뇌 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


“너는 그냥 어둠을 무서워하는 가엾은 아이일 뿐이야. 그래서 나를 필요로 했던 거야.”


“…거짓말 하지 마.”


“이제 괴로워하지 말고 나를 나줘. 내가 네 곁에 있을수록 넌 더 어둠에 짙게 물들 뿐이야. 빛이 있는 곳엔 어디든 어둠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내 곁에 있으면 안 돼.”

 

“거짓말 하지 말라고! 날 위한다는 척 하지 마! 네가 그 자식한테 가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그 자식한테 가고 싶어서! 날 버리려고…!”

 

 

 

 

 

 


소년은 소녀에게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소녀는 소년이 그럴수록 더욱 가엾다는 눈으로 바라 볼 뿐이었다. 자신을 가엾다는 듯 바라보는 소녀의 눈을 본 소년이 소리치던 걸 멈추고는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잘 있어. 소녀가 소년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발을 떼고 뒤돌아 걸어가려하자, 깜짝 놀란 소년은 소녀의 한 쪽 손목을 잡고는 그대로 소녀의 어깨에 저의 얼굴을 묻었다.

 

 

 

 

 

“날 놔달라고 했잖….”


“……….”

 

 

 

 

 

소녀는 자신의 말을 끝맺음 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대로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소녀의 손목을 잡은 소년의 손이, 소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소년의 얼굴이 떨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이 느껴지는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소녀는 소년이 자신을 왜 안지 않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서로 마주보고 있으면 자신이 우는 것이 딱 보였을 테니, 소년은 소녀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소녀의 등을 본채, 어깨에 저의 얼굴을 파묻고 우는 걸 것이라고 생각한 소녀였다.

 


“이 바보야….”

 

“……….”

 


“네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가. 차라리 욕을 해, 멍청아.”

 

 

 

 

 

소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 했다. 소년은 소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가만히 소녀의 어깨에 계속 저의 얼굴을 파묻고만 있었다. 그렇게 아무 말이 없던 소년은 무언가를 말 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 거렸고, 소년의 목소리가 소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소녀는 소년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눈물을 쏟아 부울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이 울던 소녀는 몸을 돌려 소년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허리와 등을 받쳐 안고는 끊임없이 소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미안해, 미안해.”

 

“사랑해, 히카리. 제발 내 감정이 거짓이라 하지 말아 줘. 사랑해. 사랑해….”

 

“미안해, 이치죠우지군. 미안해. 미안해 켄―.”

 

 


소녀의 말을 끝으로 소년은 소녀의 두 볼을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꺽꺽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하던 소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소년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꽤나 긴 시간 동안 키스를 나누던 소년과 소녀는 입을 떼고 서로의 눈을 맞추어 바라봤다. 소년은 소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눈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눈은 오로지 소년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진심으로 소년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동정의 눈빛일 뿐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소년은 소녀를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고개를 떨궜다.

 

 

“내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응.”

 

“난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어. 나는 히카리 너를 사랑한다고. 너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아니,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소년의 물음에 소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천천히 뜨며 소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니야. 사랑했었어. 난 먼저 지친거야, 이치죠우지군. 너의 집착뿐인 감정에 지쳐버려서 너를 포기한 거야. 나는 이치죠우지군에게 그저 어둠을 피할 방어막이었단 걸 깨달아 버렸거든.”


“……….”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 조금이라면 몰라도, 계속 나와 같이 있으면 너는 더더욱 어둠에 파묻히고 말 거야. 이제는 괜찮아, 이치죠우지군. 이치죠우지군은 어둠에 물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알겠어.”

 

 

 

소년은 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겠다며 대답했다. 소년의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소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보고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가.”


“응. 잘 있어, 이치죠우지군.”

 

 

 

 

소년은 소녀와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 한 건지, 아니면 소녀의 따스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던 건지, 잡고 있던 소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보고는 밝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방금 전 까지 눈물을 흘려서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웃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웃음은 참으로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미소를 보고 저도 따라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런 미소를 계속 너와 함께 짓고 싶었어. 네가 없어도 내가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소년은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조금씩, 점점 놓아지던 소녀의 손은 어느새 소년의 손에서 떠나버렸고, 소녀는 그렇게 뒤돌아 소년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소년은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소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아도 안 되다는 것을 알기에 붙잡지도 못하고 그저 점점 멀어져가는 소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소녀의 모습이 아예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엔, 이미 소년의 얼굴은 소녀를 따라 짓던 미소를 잃은 지 오래였고, 쓸쓸한 웃음만이 소년의 얼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인 곳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소년 역시 자리를 떠났다.

 

 

 

 

 

 

 

 

 

§

 

 

 

 

 

 

 

 


“―히카리!”


“아! 타케루군. 무슨 일이야?”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못 들어? 얼굴이 안 좋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빛의 문장인 네가 어두워지면 어떡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타케루군도 참―. 그보다 왜 부른 건데?”

 

 

 


히카리가 당황하며 말을 돌리자 금발머리의 훈훈한 소년, 타케루가 그제야 용건이 생각났는지 “아 맞다!” 하고 박수를 쳤다. 우리, 학교 끝나고 어디 놀러가지 않을래? 타케루가 밝은 웃음을 보이며 히카리에게 물었다. 히카리는 타케루의 웃음을 보고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소년을 생각했다. 다시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멍을 때리는 히카리에 의해 타케루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히카리?” 하고 이름을 부르자 히카리가 깜짝 놀라며 타케루에게 대답했다.

 

 


“아, 아! 미안해 타케루군. 어디 갈 건데?”


“궁금해?”


“당연하지. 놀러 갈 곳도 모른 채 놀러 갈 수는 없잖아?”


“아 어디를 갈 거냐면―”


“……….”


“―비밀. 이따 학교 끝나고 알려줄게. 수업 잘 들어!”


“아 정말, 타케루군!”

 

 

 


히카리가 볼을 부풀리며 소리치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는 타케루였다. 히카리는  타케루의 미소를 보니 방금 전까지 뒤숭숭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빛, 너는 희망이라 그런가. 타케루군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하지만 타케루가 자리에 앉고, 타케루의 웃음이 보이지 않자 히카리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네 미소는 나랑 닮아서, 내가 웃으면 그걸 따라 미소 짓던 이치죠우지군이 생각이 나. 사실 우리 셋은 서로에게 필요한 걸지도 몰라. 어둠과는 먼 문장을 가졌으면서, 다들 어둠을 무서워하잖아.’ 히카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소년에게 미안하다고 계속 말 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히카리는 빛이 나던 그 미소가 아닌,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어.”
“그저 널 구원해주고 싶었어.”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한 거였어.”

 

 


하지만 상처를 줄 까봐 사실을 말 하지 못했어. 히카리는 소년의 앞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말을 중얼거리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결국엔 스스로가 먼저 지쳐버려 소년을 홀로 두고 도망친 저를 생각하니 히카리는 죄책감이 점점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욱, 우욱!”


“히카리? 히카리, 괜찮아?”

 

 

 


히카리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자 옆에서 떠들고 있던 여학생 무리가 괜찮은 거냐며 히카리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히카리는 그런 여학생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괜찮아. 오늘 아침에 먹은 게 소화가 잘 안 돼서 이러나봐.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아 그래? 그럼 아프면 바로 말 해! 내가 양호실 데려다 줄게.”


“응. 고마워”

 

 

히카리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서로 떠드는 여학생들이었다. 히카리는 여학생들을 잠시 바라보다 곧 바로 책상에 엎드렸다.

 

 

 


―넌 참 이기적이야.

 

 

 


사실 이기적인 건 나인데. 히카리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조금씩 들썩거렸다. 그래도 울음소리는 내지 않으려 히카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히카리가 그렇게 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누군가 의자를 끌고 히카리의 옆에 앉더니 히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카리가 깜짝 놀라 눈물을 닦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드니 보이는 사람은 타케루였다. 히카리의 행동에 타케루도 놀란 건지 두 눈을 깜빡였다. 히카리가 또 무슨 일로 온 거냐 물으며 훌쩍였고, 타케루는 그런 히카리를 보며 입 꼬리를 올려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히카리가 저의 웃고있는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타케루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히카리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


“이치죠우지군 때문에 그러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히카리.”


“……….”


“죄책감 안 가져도 돼.”

 

 

 

 

 

우린 그냥 어둠을 싫어하는 것뿐이잖아. 타케루가 저를 편안해지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자 히카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울보네, 히카리” 타케루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히카리가 얼굴을 붉히며 “타케루군!” 하고 소리쳤다. 히카리는 그러면서도 어느새 타케루와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타케루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과 같이 있을 때의 자신은 항상 소년을 웃게 해주었을 뿐이지, 소년이 저를 웃게 하지는 않았는데. 히카리는 그러면서 생각했다.


‘죄책감을 갖더라도, 나는 타케루군과 같이 있고 싶어.’ ―라고. 하지만 히카리는 차마 생각하지 못햇다.

 

 

 

―네가 그 자식한테 가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정말 자신을 말려달라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

 

 

 

소녀의 미소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 자신의 학교 수업 시간을 빠지면서까지 찾아와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을.

 

 

 


“타케루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년에게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듯 몰려들어오는 어둠을 막을 힘은 없었기에, 자신의 눈앞을 채운 어둠의 바다를 보며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그토록 가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의 이름을 다정스럽게 부르는 순간, ‘아.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구나.’ 라는 걸 깨달은 이 순간은, 그나마 잡고 있던 소년의 의지가 끊기는 순간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위험한 생각을 했고, 방과 후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에게 위험한 생각을 했던 계획 그대로를 실행했다. 소년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성공을 했다는 것에 소년은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어댔지만, 타케루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보고서 소년은 곧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to.이치죠우지군

 

 

 

직접 만든 것 같은 것으로 추정되는 세 명과 많이 닮은 인형이 서로 똑같이 방긋 웃음을 짓고 있었고, 소년과 닮아 보이는 인형에는 소년에게 주려고 한 건지 쪽지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절망했다.

 

 

 

 

 

 

 

 

 

§

 

 

 

 

 

 

 

 

 


“…웃어줘.”


“응.”

 

 

 

 

소년은 소녀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누워있었고, 소녀는 그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소년이 소녀에게 웃어 달라 청하자, 소녀는 바로 대답하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소년을 바로 다른 부탁을 했다.

 

 


“사랑한다고 말 해줘.”


“사랑해.”

 

 

 


소녀는 소년의 말을 따라 소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지만, 소년은 만족하지 못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소년이 소리쳐도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 제발.”

 

 

 

소년이 소녀의 두 어깨를 붙잡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아무런 대꾸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옛날처럼 웃어줘. 빛나던 네 미소를 다시 보고 싶어. 나도 그렇게 웃고 싶어….”


“응. 나 지금 웃고 있잖아, 이치죠우지군.”


“이렇게 생기 없는 웃음을 원하는 게 아니야!”


“……….”


“제발. 히카리. 제발, 부탁이야….”

 

 

 


소년의 말대로 소녀의 웃음은 더 이상 예전처럼 그 밝고 생기 넘치던, 빛이 나는 듯 했던 웃음이 아니었다. 현재 소녀의 웃음은 생기를 잃어 있었고, 아무 감정 없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로지 소년의 간절한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탁하는 소년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고개를 돌린 곳에 자기가 원하던 것이 없자 소녀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쪽으로 다가가자,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있는 인형 세 개가 보였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소녀는 노란 실을 머리카락으로 단 인형을 집어 들고는 인형의 얼굴을 확인했다.

 

 

 

“……….”

 

 

 


더 이상 인형은 옛날처럼 방긋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관리를 잘 안하고 방치해둬서 그런지 얼굴은 눈, 코, 입 등을 장식한 것들이 떼어져 있었고, 몸은 여기저기 실이 터져 솜이 빠져나와 있었다. 소녀는 몸 전체가 먼지로 뒤덮여 더러워져 있는 인형을 보다가 아직 바닥에 떨어져있는 인형을 쳐다보았다.

 

 


“떨어져있구나.”


“……….”


“모두가 다.”

 

 


소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중얼거렸다.

 

 

 

툭.

 

 

소녀가 들고 있던 인형 아래로 빛바랜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소녀는 천천히 그 쪽지를 집어 들었고, 내용을 확인 하는 순간 소녀는 그 자리에서 쭈그려 앉아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온 소년 또한 그 쪽지를 보자마자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하염없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인형들을 보며 꼭 우리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결국 지고 말았어.


타케루,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전히 어둠에 지고 말 거야. 어둠의 바다에 먹혀버리고 말 거야. 소녀는 그렇게 속으로 계속 되뇌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제발 다시 돌아 와줘….”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어.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도록.”

 

 

 

 

 

.

 

 


.

 

 

.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4.12)

*수정(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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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트위터의 '서영' 님 께서 [다이켄 / 학교 체육 시간] 을 요청한 글 입니다.

- 따로 txt 파일을 만든 글이니, 소장하고 싶으시다면 이메일 주소를 덧글, 혹은 트위터로 알려주세요.:D
('서영' 님이 아닌 다른 분이 원하시는 거라면 '서영' 님께 꼭 허락을 맡은 뒤 알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경계선

 

 

─다이켄

 

written by.월화비월

 

 

 

 

§

 

 

 

 

 

 


*모토미야 다이스케 시점 입니다

 


내가 넘어짐과 동시에 호루라기 소리가 운동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경기가 끝나버렸구나. 멍을 때리다시피 나는 넘어진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나가던 친구가 내게 괜찮은 거냐고 물으며 부축해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을 때야 정신을 차렸으니,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심판을 맡고 계시던 선생님을 쳐다보니, 선생님께서 점수판을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오늘도 홀수 팀이 승리! 5:4라…. 아깝구나, 짝수 팀. 나중엔 더 분발해서 홀수 팀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해라”

“와아!”

 


홀수 팀의 함성소리가 귀에 소음처럼만 들려왔다. 홀수 팀의 환한 분위기에 비해 짝수 팀은 우울하기만 했다. 아아. 결국엔 오늘도 지고 말았구나, 저 녀석들에게, 저 녀석에게.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이번엔 이길 자신 있었는데. 넘어지지만 않았었더라면, 이겼을까? 내가 골을 했었더라면.

 


“역시 이치죠우지, 너랑 팀이 돼서 다행이라니까.”

 


시합에서 이긴 건 다 네 덕이라며 켄의 곁에 와글와글 모여서는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짝수 팀을 괜히 노려보았다. 내가 넘어진 게 저 녀석들 탓이 아닌 건 알지만, 왜 이렇게 밉기만 한 걸까. 승부에서 지든 이기든 서로 좋은 마음으로 끝내는 게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마음가짐인데, 나는 지금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정말, 웃고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 아프다.

 


“다이스케 군, 너 발목 엄청 부었잖아!”

 


우리 팀에 속해있던 타케루가 깜짝 놀라서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타케루가 말 하고 나서야 나는 발목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에서 찌릿찌릿, 통증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발목이 아파서였나보다.

 


“보건실까지 부축해 줄까?”

“괜찮다고, 이 정도 쯤은! 하하.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나저나 타케루 너 대단하던데? 세 골은 네 골이잖아.”

 


나를 걱정해주는 타케루에게 괜히 환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답하면서 일부러 다른 화제로 돌렸다. 평소엔 내가 하지도 않던 칭찬을 하니 타케루가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진짜 많이 아픈가보다.”

 


타케루가 날 걱정해서 말 한 거라는 걸 아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망할 놈, 하고 한 소리 하려고 했다가 타케루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지금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그냥 한숨만 푹 쉬었다. 하아. 그래,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타케루가 보기엔 내가 얼마나 이상하겠냐.

 


“다들 나한테 패스를 잘 해줘서 그렇지, 너희가 아니었으면 골도 못 넣었을 거야.”

 


그런데 어떡해. 저기서 저렇게 웃고 있는 녀석만 보면 열이 머리끝까지 상승하는 것 같은데! 이상한 거 맞잖아, 나.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다시 저릿하게 아파오는 가슴을 일부러 외면했다. 발목에서 나는 고통을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한쪽 다리를 끌다시피 하면서 홀로 보건실로 향했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고 가다가도 아직도 뒤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신경이 쓰여 뒤를 돌아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계속 들리는 다른 아이들과 하하 호호 떠드는 네 목소리가 미치도록 신경이 쓰여서 뒤를 돌아봤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이걸 바라고 너랑 같은 중학교, 같은 반이 된 걸 좋아한 게 아닌데.

 


“……….”

“……….”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가려고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네가 우연히 내 쪽을 쳐다봤고, 그 덕에 너를 째리듯 바라보던 내 눈과, 네 눈이 공기 중에서 마주친, 그런 신기한 일이. 눈이 마주친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 눈을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꼭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살짝 울렁거리면서도, 좋은 느낌에 나는 스스로 깜짝 놀라 표정을 굳혀버렸다. ―마치 히카리를 좋아했을 때 나던 느낌과 똑같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한.

 


“모토미―.”

 


그렇게 서로 마주보고만 있던 시선을 끊으려는 듯 너는 내 이름을 반갑게 말하려 하다가도 갑자기 입을 닫았다. 혹시 내 표정이 지금 많이 무섭게 돼 있어서 자기한테 화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에 표정을 풀고서 너를 바라보니 네 시선은 내 오른쪽 발목에 향해있었다. 아, 내 발목 보고서 놀란 거구나. 표정 때문이 아니라. 너는 계속 네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에게 억지미소를 지으며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하고서 내게로 냅다 뛰어오기 시작했다. 조금도 안 지나서 내 앞에 도착한 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발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까 경기할 때 삐끗한 거야? 넘어졌어?”

“응, 그냥 뭐.”

“아 왜 못 봤지…. 괜찮아? 모토미야 군?”

 


계속해서 내 걱정을 해주는 너를 보니 발목에 대한 통증은 싹 잊히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공기 빠진 웃음소리를 내버렸다. ‘그래, 네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걸로 된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욕심 안 부리고, 그냥 이렇게.

 


“같이 보건실까지 데려다 줄게, 모토미야 군.”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욕심 부리고 싶어졌다. 내가 뭘 욕심 부리고 싶어 한다는 것 자체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그놈에 모토미야 군.”

“응? 무슨 소리야 모토미야 군?”

 


네 녀석의 입에서 ‘모토미야 군’ 이 아니라 ‘다이스케’ 라는 말이 나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것. 뭔가 켄이 부르는 ‘모토미야 군’은 듣기 거북했고, 싫었다. 스스로 켄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녀석이 그렇게 부르니 꼭 별로 안 친한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모토미야 군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 좀 다이스케라 불러주지 그래? 초등학교 6학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리 많은 시간을 알고 지냈잖아.”

“아. 근데 좀 어색한데….”

“아아아. 몰라. 이제 다이스케라고 안 하면 나 네 말 무시 할 거야!”

 


뭔가 더럽고 치사한 방법이지만, 이렇게 안 하면 켄은 절대 나를 다이스케라고 불러줄리 만무했다. 그러니 이런 방법이라도 쓸 수밖에. 켄은 삐진 척 돌아 선 나를 보고는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더니 내게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다이스케.”

“……….”

 


정말, 불렀다. 뒤에 ―군, 하는 호칭도 없이 오로지 내 이름만. 부를 줄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있는 나였다. 그저 눈만 계속 껌벅이고 있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내 예상이 맞았는지, 켄은 입 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더니 나를 보고선 이번엔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다이스케, 다이스케!

 


“…다이스케? 왜 그래?”

“아니, 아니,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나 쳐다보지 마! 내 이름 부르지도 마!”

 


무슨 소리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는 켄을 두고 초인적인 힘으로 아픈 다리를 끌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발목이 더 악화될 것 같지만, 켄에게 지금 내 얼굴을 들키는 것 보다는 백배, 천배 낮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발목아 미안.

 


“다이스케! 너 그 발목으로 뭐 하는 거야!”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따라오지 마!”

 


내 말에 따라오려던 켄의 발걸음이 멈췄고, 그걸 확인한 난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보건실로 향했다. 쾅, 시끄러운 문소리가 다 나도록 보건실에 들어와 문을 세게 닫은 나에 의해 보건 선생님이 깜짝 놀라 커피를 마시던 컵을 내려놓으셨다. 내게 따끔한 일침을 하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던 선생님은 나를 보시고는 크게 놀라시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 문을…. 어머! 얘, 너 괜찮니? 얼굴이 시뻘겋잖아! 머리 안 아팠어?”

 

 

 

 


§

 

 

 

 


체육시간이 마지막이여서 그런지 내가 교실로 가니 이미 교실은 학생 한 명 없이 텅텅 빈 상태였다. 뭐야, 나 빼고 종례한 건가…. 어떻게 단 한 명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갈 수 있지? 괜히 툴툴거리며 가방을 챙겼다. 해 지는 저녁노을이 창을 통해 들어왔고, 그 노을을 보며 멋지다, 라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바닥을 향한 채 가려던 그 순간,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던 건지 길게 늘여진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지? 싶어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꽤나 심통이 난 표정의 켄이었다. 켄이 왜 집에 안 가고 아직 여기에? 하는 생각과 함께 내 발걸음은 멈추고 말았다.

 


“…집에 안 갈 거야? 뭐해.”

“가, 갈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냐!”

“너 기다렸는데? 다이스케.”

“…아, 그래.”

 


그렇게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서로 오가면서 학교 복도를 걸었다. 오늘따라 복도가 왜 이리 길어 보이지. 분명 지금은 봄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여름처럼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켄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 맞아. 켄은 날 왜 기다린 거지?

 


“근데 켄.”

“어?”

“나 왜 기다렸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던 거 아냐?”

“…아. 그냥, 뭐, 친구니까.”

 


아아, ‘친구니까’ 인 건가. 씁쓸한 미소가 잠시 내 입 주면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우울하면 다이스케가 아니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정말, 충동적으로, 뒤를 생각 못 한 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나저나 켄, 너는 내가 얼마나 좋냐?”

 


헐, 나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하고 후회를 했을 때는 이미 내가 말을 꺼내버린 뒤였다. 내 질문에 켄은 꽤나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어떤 미친놈이 자기 친구한테 이런 걸 묻겠어. 아직 내 마음도 제대로 정의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말을 꺼낸 내가 매우 창피했다. 지금 당장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말이 없는 켄을 보며 켄이 그냥 대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내가 상처받을 것 같고…. 응? 내가 상처를? 왜지? 머릿속이 갈수록 복잡해져만 갔다. 아, 오늘 나 왜 이래! 괜히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걷고 있는데, 켄이 뭔가를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안 들렸어. 내 말에 켄이 얼굴을 화악 붉혔다.

 


“어? 켄, 너 열나?”

 


내 말에 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까 켄이 한 말이 궁금해 뭐라 한 거냐고 조심스레 물으니, 켄이 잘만 걷다가 갑자기 우뚝 섰다. 켄이 서니, 나도 설 수 밖에. 나 역시 걸음을 멈추고 켄을 지그시 바라보니, 켄이 아직도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작게 대답했다.

 


“많이 좋아한다고.”

“…에?”

“다이스케, 너! 많이 좋아한다고….”

 


난 대답했다! 하고 창피한 듯 뛰어가는 켄이었다. 나 지금, 뭐 들은 거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비록 아픈 발목 때문에 뛰어가서 켄을 쫓아가지는 못했지만, 내 목청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이제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켄에게 소리쳤다.

 


“켄!”

“……….”

“나도 너 많이 좋아해!”

 


내 대답에 잠시 멍을 때리던 켄은 다시 한 번 얼굴을 화악 붉히며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갔다. 아, 귀엽다. 저렇게 빨리 가도 결국 밑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을 켄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빨리 내려가서 부끄러워하는 켄 얼굴을 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 거라면, 우린 서로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켄?
우리가 그 경계를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

 

 


.

 

 


.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4.12)

*수정(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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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그 물체는 칼입니다. 식칼정도?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6.22)

*수정(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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