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mon

라일락

 

written by. 월화비월

 

 

 

어두운 시각, 낮의 분주했던 병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하다. 어두운 복도를 비추는 것은 오직 비상구를 알리는 유도등에서 나오는 초록 빛깔뿐이었다. 또한 서늘한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들어오는 달의 구슬픈 시선만이 심심한 병원 복도 바닥에 닿으며 그림자를 형성했다. 타다닥. 누군가의 급한 뜀박질 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려 퍼졌다. 바닥에 나뭇잎이 아닌 또 하나의 그림자가 졌다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고 사라진다. 친구가 생겨 좋아했던 나뭇잎의 그림자는 다시 홀로 남고야 말았다. 쓸쓸한 바람이 조그마한 창틈 사이로 불어 들어와 그림자를 흔들었다.

 

!”

큰 소리와 함께 어느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급하게 열어젖힌 탓인지, 문이 벽에 부딪혀 반동되어 튕겨져 나왔다. 그런 문을 붉은 빛깔의 짧은 머리를 한 소년이 저의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붙잡는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듯 손잡이를 꼭 잡은 채 소년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신이 아찔하다. 바라보고 있자 하니, 막막해져만 갔다. 저를 공허함의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 소년이 손잡이를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쥐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코시로. 한동안의 정적 탓에 무거웠던 진공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는 그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지끈 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히고서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입니다, 타이치상.”

 

어디선가 나는 진한 꽃내음에, 소년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떠 보이며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보랏빛의 겹겹으로 쌓여져 조그마한 꽃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저 꽃은, 라일락임이 분명했다. 후각으로 전해지는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이 향기 역시, 라일락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확신을 더했다.

뚜벅뚜벅. 그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침구 옆의 수납공간에 놓인 조그마한 화분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화분에 저가 사온 것으로 추정되는 라일락을 예쁘게 꽂았다. 만족한 듯 병실을 둘러보던 그가 침대에 죽은 듯 뉘어있는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만큼 그의 눈빛은 애틋했다. 소녀의 손을 꼭 잡는 그의 손동작, 표정………. 그가 소녀에게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어떠한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또한,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참으로 비참하다 생각했다.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 히카리.”

 

분명 그가 소녀에게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그는 소녀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있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러한 이유로 계속 자신을 탓했다. 그가 소녀에게 사과를 하는 동안,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자신이 밉다. 소년은 그저 손만 꼼지락거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히카리.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서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앞으로, 결코 그 어떤 것들도 감히 너를 건드리지는 못 할 거야. 금세 눈빛이 바뀌어서는 말을 하는 그를 보고,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움찔거렸다. 갑자기 몰아치는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꽤나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병실 창문이 힘을 못 이기고 활짝 열려 젖힌다. 창이 열림과 동시에 들어오는 먼지를 삼킨 바람에 눈이 아파 짧은 신음을 내며 소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소년이 눈을 떠 보였을 땐, 그는 어두운 밤에 어울리는 형체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년의 눈이 잠시 흔들리며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블랙 워 그레이몬.”

 

이내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소년의 동공은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까와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것 같은 초조함에 소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입술 깨물지 마, 흉 져.”

……….”

하여간 말 안 듣는 건 여전하다니까, 코시로.”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저를 대하는 모습에 소년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점점 시큰해져오는 콧잔등이 먹먹해져왔다.

 

그만하면, 안 되는 건가요?”

……….”

멈출 수는 없어요?”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고요, 타이치상.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깜짝 놀란 듯 동요하던 그였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천천히 떠 보였다. 다시 침착한 상태로 돌아간 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다른 방법은 많잖아요. 이건 분명 히카리상도 원치 않을 일이란 것도, 다 알잖아.”

코시로, 나는.”

대체 , . 우리가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소중하게 지켜왔던 곳을 파괴하고 있어요.”

……….”

왜 그러면서, 타이치상이 더 아파할 길을 가고 있냐고요.”

 

뚜벅, 뚜벅. 그가 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도,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로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이내 저의 밑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고, 그 그림자는 저에게 손을 뻗었다. . 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는 손길에 소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울적함에 소년이 코를 훌쩍였다.

 

미안해, 코시로.”

……….”

하지만 나는 이제 겁쟁이일 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

타이치상이 겁쟁이라니, 무슨!”

 

힘없는 목소리로 말해오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소년이 그가 한 말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지 대들며 언성을 높였지만, 그의 쓸쓸한 얼굴에 차마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을 이어했다.

 

아구몬이 말이야. 왜 워 그레이몬이 아니라, 블랙 워 그레이몬으로 진화했을 것 같아, 코시로? 그리고, 에너지는 분명 바닥을 치고도 남을 시간인데 왜 그 뒤로 다시 안 돌아가는지. 알고 있어?”

왜 그럴까 생각은 해 본 적은 있지만, 타이치상을 그 뒤로 본 적도 거의 없고, 확실한 이유는 모르죠.”

내가 용기를 잃어버렸거든. 이게 이유야. 그리고 돌아가지 않는 건 아마, 겁쟁이가 되어 버린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까하고.”

타이치상은 그 누구보다 용감했어요. 특히 모두를 생각하고 앞을 바라볼 줄 아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되어줬다고요.”

 

아아, 그랬나. 고마워, 코시로. 그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그의 미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미소가 진실 된 것이 아님을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소년은 한 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던, 나는 앞으로 멈출 생각이 없어.”

타이치상!”

네 말이 모두 맞아, 코시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결코 좋지만은 않아. 스스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

그럼 왜.”

불공평하잖아.”

 

그 새끼들은 은혜도 모르고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내가 언제까지고 은혜를 베풀기만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코시로.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왠지 모를 소름에 소년이 몸이 굳어서는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잠깐만요. 타이치상!”

 

어느새 다시 블랙 워 그레이몬의 어깨에 앉은 그는 소년의 애원 소리에 잠시 소년에게 눈길을 두었다. 하지만 이내 소녀에게 눈길을 돌려버리더니, 이제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는 그렇게 달을 향해 올라갔다.

소년이 급하게 창 쪽으로 달려가 고개를 빼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볼을 스치는 이 쓸쓸한 바람처럼, 그들의 뒷모습이 달빛을 받아 더욱 쓸쓸해 보임에 소년이 안타까움의 탄식을 자아냈다.

 

결국, 자신은 그를 설득하지 못 했다. 이의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소년은 눈물을 흘려보냈다. 긴장이 풀린 다리까지 더해져, 바닥에 주저앉고는 소년은 조용히 흐느꼈다. 소중한 소녀가, 저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에.

 

 

 

*

 

 

 

큰 파괴 음에 타이치가 무표정으로 귀를 막았다. 마을을 하나 파괴할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매우 시끄러웠다. 이젠 지겨워.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파괴되어 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죽을 때 찍 소리도 못하고 죽어가는 생명들에 타이치는 공기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죽어도, 다시 알에서 태어나는 놈들이니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군. 하하. 미친 사람처럼, 혼자 실소를 터트려대는 타이치에게 블랙 워 그레이몬이 조용히 다가섰다.

 

타이치, 발견했다.”

 

블랙 워 그레이몬의 말에 그의 몸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 그러다 이내 입가에 한가득 웃음을 담아 보이며 타이치가 말해왔다.

 

어디 있어, 그 자식?”

 

아무런 말없이 앞장을 서 보이는 블랙 워 그레이몬의 뒤를 졸졸졸 따라가면서 타이치는 하늘을 바라봤다. 빛나는 것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어떻게 봐도 깊숙한 것이, 숨기에는 아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장소였다. 어이가 없어 타이치가 짧은 실소를 터트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이 가장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는 디지몬에게 멈추었다. 시린 눈빛이 저에게 닿자 디지몬은 몸을 벌벌 떨었다. 아 그래, 너 거기 있었구나.

 

널 찾았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죄송해요.”

 

저에게 깍듯이 사과를 해오는 디지몬에 타이치는 더욱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잖아. 그렇지? 너희, 선택받은 아이들이니까. 우리도 화를 풀 상대가 필요했던 것뿐이란 거, 아니까.”

 

지끈. 타이치는 두통이 오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한 그 날의 잔상이 괴롭다. 그런 타이치를 바라보며 블랙 워 그레이몬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타이치, 할게. 블랙 워 그레이몬의 날카로운 손톱이 들어 올려졌다.

 

잠깐만.”

 

웬일로, 그런 블랙 워 그레이몬을 제지시키는 타이치였다.

 

 

*

 

 

 

긴 밤이 끝나고, 아침이 다시 찾아왔다. 소라는 어느 때처럼 히카리의 병실로 들어가려 문을 열었다.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짓고 병실 안으로 발을 내딛는데,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져서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코시로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다.

 

코시로군,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코시로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눈치채지 못 했던 소라가 어디선가 나는 향긋한 내음에 눈을 번쩍 떴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곳엔 연보랏빛 라일락이 아직은 생생한 기운을 보이며 달콤한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타이치, 다녀갔던 거야?”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코시로가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소라상.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내뱉은 코시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꽃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으로 꽃을 조심스럽게 쓸며 입을 열었다.

 

라일락. 꽃말이 뭔지 밤 새 생각해 봤는데요. 꽤 많더라고요, 꽃말이.”

뭔데, 그게?”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 친구의 사랑, 우애요.”

바보답네.”

 

 

저는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워하는 코시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소라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히카리가 탈 없이 깨어나기를 바라야지.”

……….”

히카리가 조금이라도 잘 못 되는 날에는, 그 바보 녀석, 우리까지 죽이려 할지도.”

 

소라가 농담으로 한 소리인 것을 암에도 코시로는 조금의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그저, 소라가 말했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며, 코시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히카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라일락과 묘하게 닮은 모습을 코시로는 천천히 저의 눈에 담았다.

 

저는 그냥, 타이치상이 상처를 안 받았으면 좋겠어요.”

 

라일락의 은은함이 더욱더 퍼져갔다.

 

 

 

*

 

 

 

Epilogue_, 그리고……….

 

 

 

웬일로 블랙 워 그레이몬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워 그레이몬도 아니고, 블랙 워 그레이몬의 모습으로 삐져서는 뾰로통한 모습은 타이치에게는 꽤나 낯설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지만, 녀석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자기의 말에 대답 안 하기는 블랙 워 그레이몬의 평소 모습과 똑같다는 생각에 그냥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어 타이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제야 블랙 워 그레이몬이 입을 열었다.

 

왜 그 녀석을 살려둔 거야, 타이치?”

글쎄. 심경의 변화라던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타이치는 오래간만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혼자 남겨져 있는 편이, 더 괴로울 것 같아서. 내가 언제 죽이러 다시 자기에게 올지 모르는 그 불안한 상황 속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고립돼 있는 편이 복수라기엔 더 적합하잖아.”

 

 

 

*

 

 

 

타이치, 있잖아.’

?”

그럼 이제 다시 돌아가는 거야?’

……….”

모두들 널 기다리고 있어. 이제 복수는 끝났어, 타이치.’

……….”

돌아가는 거지?’

아니.”

어째서?’

혼자 남겨져 있는 편이 훨씬 괴로우니까.”

타이치.’

너에게, 그리고 죄 없는 친구들에게 나는 충분히 죄인이잖아.”

아니야, 타이치. 그렇지 않아.’

고마워, 아구몬.

 

타이치,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어디든 상관없어. 가자, 블랙 워 그레이몬.”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6.01.15)

*수정(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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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트위터의 [#우리들의_디지몬_100제_합작] 중 ‘40.휴식’을 주제로 쓴 글 입니다.

 

 


*디지몬 100제_ 40.휴식

 

 

written by. 월화비월)

 

 

 


§

 

 

 


사람들이 디지털월드에 접근을 할 수 없게 된지 그날로부터 어느새 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또한, 디지털월드에서 태어나 자란 디지몬들조차 자신들의 고향인 디지털월드에 돌아가지 못했다. ―분명 하루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랬기에 온 세상의 디지몬 테이머들은 하루아침에 디지몬 친구들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자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 역시 다를 것 없었다. 소년의 방 밖에서는 한 소녀가 중년으로 추정되는 나이대의 여인에게 안겨 꺼이꺼이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너무나도 달랐다. 여인의 품 안에서 울음을 점점 그치며 안정을 취해가는 소녀와는 달리 소년은 시간이 아무리 가도 여전히 암울한 분위기였다. 소녀와는 다르게 소년은 크게 소리 내어 울지도, 그렇다고 눈물을 많이 뽑아내지도 않았다. 한 두 방울 눈물을 흘린 소년은 허탈한 웃음을 지은 채 두 손에 사진 한 장을 꽉 쥐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구몬.”

 


소년은 작게 저의 디지몬 친구 이름을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디지몬 친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소년을 바라 볼 디지몬 친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디지몬 친구는 사진 속에 다른 이들과, 또 소년과 함께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 뒤의 하얀 여백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999.08.01. 그 여름 캠프로부터, 소중한 인연」

 


“어디로 가버린 거야.”

 


소년의 어깨가 점점 떨려왔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소리를 죽이려 저의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눈물을 흘렸다. 소년의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 한 줄기가 참 시렸다.


야가미 타이치, 17세. 고등학생 2학년.
―그 소년은 혼자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든 상관없이 소년은 항상 그러했다.

 

 

 

 


§

 

 

 

 


타이치. 타이치는 가까이에서 아구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화들짝 놀란 타이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구몬의 형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역시 환청이었나. 타이치가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타이치는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탓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이 주말이어서 다행이다, 라고 타이치가 스치듯 생각했다. 혹, 오늘이 평일이어서 당장 학교를 가야만 하는 날이었다면 슬퍼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버팀목이 되어줘야 해.’
‘디지몬들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걸까.’

 


타이치의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특히 후자의 생각보다는 선자의 생각이 더욱 강했다. 리더의 자리에 있는 자기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타이치는 지금 저의 상태보다 다른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타이치가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동안을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타이치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타이치가 천천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화면을 열었다. 코시로의 문자였다. 문자를 확인해야할지, 말지에 대해 망설이던 타이치는 결국 「Yes」 버튼을 눌렀다. 문자를 확인한 타이치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아무 말 없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리곤 방 밖으로 나가 노크도 없이 히카리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히카리는 침대에 엎드리듯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상태였다. 이제 울지 않는 구나, 다행이다. 히카리가 울지 않는 걸 확인한 타이치가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히카리.”

 


타이치의 목소리에 히카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타이치를 바라봤다. 히카리의 용모를 확인한 타이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항상 생기가 넘치던 히카리의 눈은 이미 빛을 잃은 상태였고, 그 환하게 웃던 미소 역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이치는 순간 저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야, 오빠? 많이 울었는지 히카리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진 음성을 내고 있었다. 저의 목소리에 자신도 놀랐는지 히카리는 눈을 크게 뜨며 큼큼, 하고 목소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타이치는 그런 히카리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모두가 기운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해.’ 타이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언제나 그랬듯, 평소와 같이 활기찬 목소리로 히카리에게 말했다.

 


“가자, 히카리.”

“응? 어디를?”

“코시로 집에. 디지바이스 꼭 챙기고 나와!”

 


오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타이치는 그 말을 끝으로 히카리의 방문을 닫고 거실로 향했다. 타이치의 부모님은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디지몬에 관한 뉴스였다. 대충 아직까진 디지몬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왜 사라진 건지에 대해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어 죄송하다는 내용인 걸로 보였다. 어느새 자신들의 옆에 서있는 타이치를 눈치 챈 여성과 남성은 깜짝 놀라며 타이치의 상태를 확인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타이치의 모습에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어보이는 부모님을 보며 타이치 역시 웃음을 짓고선 말했다.

 


“코시로 집에 다녀올게요! 히카리한테는 1층에서 기다린다고 말 해주세요.”

 


늦게까지 놀다오면 안 된다! 여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타이치는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에, 오빠 진짜 먼저 나갔어요?”

“응.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아마 지금쯤이면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히카리! 저녁 늦게 오면 안 돼!”

 


네에―. 히카리는 옅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잠기는 것 까지 확인한 히카리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 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거의 앞까지 도착한 히카리가 창 너머로 보이는 엘리베이터 층수에 아직 안 도착 했구나, 하고 안심하며 모퉁이를 돌려했지만 누군가의 무거워 보이는 두 어깨에 그 자리에서 더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 벽에 몸을 딱 붙인 채 슬쩍 고개만 내민 히카리는 잽싸게 등을 벽에 붙이고 저의 존재를 숨겼다. 타이치였다. 소리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서럽게 흘리고 있는 그 사람은, 저의 오빠인 야가미 타이치였다. 히카리는 숨죽이며 엘리베이터가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결국 타이치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히카리가 그제야 모퉁이를 돌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히카리! 빨리 내려왔네.”

“…응, 오빠.”

 


1층에 히카리가 도착해 밖으로 나서자마자 타이치가 웃으며 히카리를 반겼다. 히카리는 그런 타이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코시로의 집으로 향했다. 히카리는 계속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저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며 분위기를 계속 띄우려 하는 타이치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오빠.’

 


히카리는 그렇게 몇 번 씩이나 속으로 타이치에게 사죄했다. 저의 버팀목인 오빠가 무너진다면 자신이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히카리는 타이치에게 아까 왜 울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오빠는 분명 괜찮을 거야. 나 말고 오빠를 위로해줄 사람들은 많은 걸. 히카리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웠지만 코시로의 집에 도착 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이, 코시로. 왜이래? 너무 풀죽어 있잖아, 너. 엑, 다들 너무 우울하다니까! 애들은 지금 잘 있을게 분명해! 모두 잘 알잖아?”

 


하지만 히카리의 생각은 틀렸다.

 


“자자, 다들 스마일! 웃자고!”

 


이 소년을, 저 보다는 다른 이들의 짐만 덜어주려 하는 타이치를 위로해주는 이는 끝내 없었다. 모두 타이치에게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미소를 되찾아갈 뿐, 타이치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이는 단 한명도 있지 않았다.

 

 

 

 


§

 

 

 

 


“타이치, 밥 먹어야지.”

“배 안 고파요―.”

 


타이치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크게 소리쳐 대답하고는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는 아까 전의 일들을 정리했다.

 


‘디지몬들이 다시 디지털월드로 돌아간 건가 싶어서 코시로의 노트북과 디지바이스로 별 짓을 다 해봤지만 디지털 게이트는 전혀 열리지 않았어.’
‘내일 다시 만나서 해보자고는 했지만 과연 디지몬들이 디지털월드로 돌아간 게 맞을까? 디지털 게이트가 열릴 가능성은?’

 


타이치는 머리를 싸매며 고민을 했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자 답답한지 저의 가슴 언저리를 몇 번 내리쳤다. 그러던 와중, “타이치” 하고 코로몬의 목소리가 타이치이 귓가에 들려왔다. 타이치는 깜짝 놀라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분명 이번에도 환청일게 분명해. 하고 단정을 지은 타이치는 베개에 저의 얼굴만 파묻었다. 잠시 후, 무언가 생각난 타이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요즈음 들어 코로몬이 계속 저에게 하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려진 것이었다. 타이치는 집중해 가장 최근 코로몬과 한 대화를 회상했다.

 


「타이치.」

「왜. 또 배고파?」

「타이치,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어.」

「그래 그래, 배고픔이 너를 부르고 있겠지.」

「그게 아니야 타이치. 나뿐만이 아니야. 모두를 부르고 있어!」

 


이때 타이치는 코로몬이 틈만 나면 하던 말이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자신이 바보였다. 코로몬의 말을 쉽게 넘겨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타이치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가 눈치만 챘더라면.”

 


―모두가 슬퍼하는 일 따위 생기지 않았겠지. 타이치는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저의 머리를 쥐어 잡았다. 왜, 왜 눈치를 채지 못한 거야. 코로몬은 계속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는데. 괴로움이 가득 담긴 타이치의 중얼거림은 그저 타이치의 방 안에서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깜깜하기만 했던 타이치이 방 안에 달빛이 창 사이로 들어왔고, 그 빛은 타이치를 비추었다. 침대위에 걸터앉아 저의 머리를 쥐어 잡고 있는 타이치의 얼굴이 달빛에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져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림자가 미처 닿지 못한 그의 안면 아랫부분은 확실히 보였다. 그는 또 울고 있었다. 다른 이와 함께 있을 땐 웃음으로 저를 포장했던 그는 혼자가 되었을 땐 이렇게 항상 눈물을 흘렸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책하면서 다른 이들을 저가 이끌어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어, 아구몬. 타이치는 저의 디지몬 친구를 그리워했다. 저의 디지몬 친구만큼은 자신을 격려해주었다. 홀로 이렇게 자책하고 있을 때에 저의 디지몬 친구는 아구몬이었을 때도, 코로몬이었을 때도, 상관없이 “걱정 마. 타이치, 나는 항상 타이치의 곁에서 타이치가 웃을 수 있도록 해 줄 거야.” 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타이치. 너는 왜 네가 모든 걸 끌어안고 가려고 하는 거야? 친구들한테 말하면 좋을 텐데.」

 


어느 날 코로몬이 슬퍼하고 있는 타이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타이치는 이때 아무 말 없이 코로몬을 냅다 끌어안았다. 당황한 코로몬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고, 타이치는 코로몬에게만 들릴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리더잖아.」
「어릴 때에 죽음의 공포에서 싸워 온 그 애들은 이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슬픔과 고통은, 자기 혼자로도 충분하니 그들은 걱정 없이 행복했으면 한다고, 타이치는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렇게 조금 침묵이 흘렀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던 코로몬은 갑자기 타이치의 얼굴에 철썩 들러붙었다. 그러자 타이치가 숨 막힌다며 발버둥을 쳤고, 우울했던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었다. 타이치에게 코로몬은 저의 고독을 아는 한 명의 친구였다. 그리고 코로몬이 없는 지금―

 


“으, 으으….”

 


―그는 혼자였다.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계속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빨려 들어가기만 하는 그를 꺼내줄 수 있는 이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 으,”

“……….”

 


울음소리가 새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타이치의 구슬픈 울먹임을 듣는 이가 있었다. 타이치의 방문에 등을 기댄 채 히카리는 저의 입술을 깨물었다. 히카리는 저의 오빠의 울음 소리를 목이 말라 부엌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듣고야 만 것이었다. 미안했다. 항상 히카리는 저의 오빠에게 미안해했다. 위로만 받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자신은 저의 오빠에게 위로를 해줄 수 없었다. 히카리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히카리가 저의 방으로 들어간 뒤 얼마 후, 타이치는 멍하니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띠리릭.”

 


그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만이 타이치가 어딘가로 향하기 전 집에 유일하게 남긴 인기척이었다. 아직 잠에 들지 않은 히카리만이 그 소리에 반응을 했지만, 오빠가 생각을 정리하려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는 거겠지. 라고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다시 오빠는 활짝 웃을 테니까.’

 


히카리는 불안감이 저의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잠을 청했다.

 

 

 

 


§

 

 

 

 


“거기 있어? 아구몬? 음, 코로몬인 상태로 있으려나.”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어, 타이치.’

 


타이치는 또 아구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구몬이 사라진 뒤부터 계속 이랬다. 계속 자기는 저의 옆에 있다는 걸 알려주듯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구몬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이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항상 내 옆에 있다는 걸 알아, 아구몬. 타이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휴식을 취해볼까 해. 편안히 생각할 수 있는 꽤 긴 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

‘그러지 마, 타이치!’

“아구몬, 난 정말 네가 없었다면 이미 아주 예전에 나락의 끝에 닿았을 거야. 그래서 너와 만날 수 있었던 인연에 정말 감사해.”

‘나도 너와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네 파트너가 이정도 밖에 되지 못해서 미안해.”

 


타이치는 마지막 말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치는 자리에 주저앉아 처음으로 소리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많이 노력했어. 한참을 울음을 토해낸 타이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별이 참 반짝거리며 빛났다. 도시의 매연들로 인해 평소엔 잘 보이지도 않던 밤하늘의 별이 유독 오늘 수놓듯 자리 잡고 있었다. 타이치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타이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가 잘 해내어야만 해.’ 하고 자신을 옥죄었던 것을 벗어나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길로 가기위해 타이치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조금만 쉬고 올게.”

 


타이치는 허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타이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타이치, 안 돼! 타이치!’ 결국 끝까지 저의 귀에 들려오는 환청은 끝내 “잘 쉬고 와.” 라는 말 따위는 해주지 않았다. 타이치는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구몬 너라면 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타이치는 그렇게 발을 뻗었다.

타이치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을 스치는 바람의 느낌이 참 좋았다. 어느새 타이치는 후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에 다다를 때 즈음엔, 타이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꺄악! 뭐야? 이봐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타이치는 여자의 목소리에 눈을 살짝 떠보였다. 타이치의 점점 흐릿해져가는 시야에 아구몬이 보이는 듯 했다. 아구몬은 슬프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웃어 아구몬. 타이치가 힘겹게 입모양으로 말 했다. 무슨 뜻이지 알아듣지 못한 여자만이 “네? 의식 있는 거죠? 그쵸! 아씨, 핸드폰 어디 있는 거야!”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구몬은 타이치를 한참을 바라보다 말했다. 아구몬의 목소리는 오직 타이치에게만 들려왔고, 아구몬의 말을 들은 타이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쉬다 오는 거야. 타이치.’
‘잘 쉬고 와, 타이치. 반드시 다시 와야 해.’

 


아구몬에게 대답할 목소리도, 고개를 끄덕일 기력이 없는 타이치는 그저 눈만 천천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에 끝에, 타이치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 아구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이치가 정신을 잃을 즈음─

 


“무슨 또 갑자기 비래? 아 여보세요? 여기 사람이….”

 


―맑기만 했던 밤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충격을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계속 불러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잠에 푹 빠져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덜컥 겁이 났다. 아이들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면 딱 알 수 있듯이, 이 상황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들이었다. 그 중 히카리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울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야마토처럼 분노를 표하지도 않았다. 히카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타이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현관문의 소리는 타이치가 휴식을 취하러 간답시고 집을 나가기 전 남긴 인기척이자, 도움의 요청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이었다. 자신에게 휴식을 공간을 제공해 달라는 타이치의, 뜻이었다.

 


“오빠.”

“……….”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빨리 의식을 찾아줘. 내가 제대로 사과 할 수 있도록. 히카리는 끝내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울음을 삼켰다. 자신은 울 자격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지금 저들이 울 자격도, 화를 낼 자격도 없다는 걸 알지만 눈물을, 분노를 멈추지 못했다. 지금껏 타이치에게 기대기만 한 자신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타이치는 우리만을 생각했는데, 정작 우리는 타이치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삐, 삐, 삐…. 타이치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저 심장 박동소리가 이어져 끊기는 것만 피해가기를, 하고 바라는 것만이 지금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타이치.」

「왜, 아구몬?」

「나는 타이치한테 어떤 존재야?」

「글쎄. 식충이?」

「뭐? 너무해 타이치!」

「하하. 당연히 농담이지!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냐, 너는?」

「엑, 나는 진짜 놀랐다고!」

「음. 아구몬 너는 나한테 어떤 존재냐면….」

「……….」

「나의 유일한 휴식처. 응, 이거 같아.」

「뭐야 그게? 휴식처라니?」

「자세히는 몰라도 돼! 하여튼 아구몬! 너는 나한테 꼭 필요한 존재니까!」

「좋은 뜻이야?」

「당연하지, 바보야.」

 


─그 여름 날, 소중한 인연과의 대화는 이러했다.

 

 

.

 

 


.

 

 


.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4.12)

*수정(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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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mon

Dream_(희망), 망상

 

 

 

 

야가미 남매 / 타이히카

written by. 월화비월

 

 

 

***

 

 

 

쏴아아. 잔디가 무성히 자란 드넓은 들판 위,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산들 거리는 바람의 감촉을 느꼈다. 소녀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가만히 감겨져 있는 두 눈에 길게 붙어있는 가느다란 속눈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소녀의 눈가를 촉촉이 적시던 말간 이슬이 잔디에 툭, 하고 떨어진다. 애꿎은 저의 입술을 윗니로 꾹 누르는 소녀의 모습이 처량하다.

 

히카리. 그토록 그리워하던 누군가의 목소리에 소녀가 순간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떠보이자, 바로 보이는 소녀의 두 눈동자가 매우 가라앉아있다. 그 어디에도 시선을 고정하지 않은 초점 없이 멍한 눈에 주위의 공기 역시 가라앉는 듯하다.

 

. 소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여전히 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소녀가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바스락. 소녀가 일어나며 풀잎을 짓밟는 소리가 쓸쓸하다.

 

달싹. 소녀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작게 움직였지만, 이내 무언가에 의해 다시 닫혀버리고 만다. 소녀의 두 손이 저의 입을 가로막고 있다. 두 눈에 힘이 풀리며 눈가에 다시금 이슬이 맺힌다. 히카리. 소녀는 저의 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에 결국, . 하고 풀린 다리를 후들거리며 눈물을 쏟아낸다. 엉엉, 구슬프게 울음을 토해내는 소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떨렸다.

 

울지 마, 히카리.’

…….”

웃어. 히카리의 그 빛으로 모두를 빛내줘.’

, …….”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으으. 흐윽.”

 

저의 앞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 형체가 허상임을 알았음에도, 소녀는 두 손을 뻗었다.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점점 저의 곁에서 멀어져가는 형체를 잡기위해 소녀는 발을 떼었다. 탁탁. 갈수록 급하게 움직이는 발걸음이 초조하기만 하다.

 

난 너를 믿어.’

,”

사랑해.’

가지 마.”

 

바람이 세찬 소리를 내며 거세게 불어왔다. 소녀의 몸을 재빠르게 감싸며 지나치는 바람에 소녀가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꺼이꺼이, 헛구역질을 토해낼 정도로 거칠게 울던 소녀의 입이 달싹거린다.

 

돌아와 줘, 엔젤우몬.”

 

소녀가 풀잎을 꽈악 쥐어보였다.

 

 

 

***

 

 

 

히카리, 무슨 일이야!”

 

급하게 히카리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타이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이미 긴 시간 동안을 울어버려 벌겋게 부운 눈가와, 시뻘겋게 충혈 된 두 눈을 발견한 타이치의 속이 타는 듯 했다. 고개를 든 채 저를 바라보는 두 눈이 애처롭다. 타이치는 급하게 히카리에게 다가가 머리를 꽉 껴안았다. 제 옷깃을 잡은 히카리의 손이 떨림이 느껴진다. 저를 의지한 채 덜덜 떠는 몸을 제게 맡긴 히카리가 더 이상 울지 않기를 타이치는 속으로 몇 천 번이고 바랐다.

 

엔젤우몬 꿈을 꿨어, 오빠.”

……….”

보고 싶어. 오빠, 나 엔젤우몬이 보고 싶어.”

히카리.”

어떡해 오빠. 나 어떡해.”

 

울고 있는 히카리에게 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 타이치가 애꿎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히카리의 어깨를 감싼 두 손에 힘이 들어온다. 자동으로 재생되는 그 날의 일에 타이치는 눈을 꽉 감아버린다. 울지 마, 히카리. 아파하지 마. 오빠는 계속 네 곁에 있을 거니까, 제발. 이런 타이치의 진심어린 음성은 히카리의 서글픈 울음소리에 묻혀만 갔다.

 

제발, 히카리.”

 

울음을 토하는 데에 힘을 다 써버린 히카리의 몸이 힘이 빠지며 타이치에게 기대듯 쓰러진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바로 눕힌 히카리를 타이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두 눈 가득 담긴 타이치의 진심을 히카리는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자그마한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든 채였다. 스륵. 히카리의 손에 힘이 풀리며 자연스레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펴진다. 풀잎 가닥이 후두두, 바닥에 쏟아졌다. 히카리의 손에 끈질기게 붙어있는 풀잎 가닥 하나를 타이치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직접 떼어내었다. 생생해 보이는 풀잎가닥에 타이치는 실소를 작게 터트린다. 힘없이 올라간 한 쪽 입 꼬리가 무겁다.

 

쏴아아. 타이치의 귓가에 산들거리는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5.13)

*수정(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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