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written by. 월화비월
어두운 시각, 낮의 분주했던 병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하다. 어두운 복도를 비추는 것은 오직 비상구를 알리는 유도등에서 나오는 초록 빛깔뿐이었다. 또한 서늘한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들어오는 달의 구슬픈 시선만이 심심한 병원 복도 바닥에 닿으며 그림자를 형성했다. 타다닥. 누군가의 급한 뜀박질 소리가 복도에 가득 울려 퍼졌다. 바닥에 나뭇잎이 아닌 또 하나의 그림자가 졌다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고 사라진다. 친구가 생겨 좋아했던 나뭇잎의 그림자는 다시 홀로 남고야 말았다. 쓸쓸한 바람이 조그마한 창틈 사이로 불어 들어와 그림자를 흔들었다.
“쾅!”
큰 소리와 함께 어느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급하게 열어젖힌 탓인지, 문이 벽에 부딪혀 반동되어 튕겨져 나왔다. 그런 문을 붉은 빛깔의 짧은 머리를 한 소년이 저의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붙잡는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듯 손잡이를 꼭 잡은 채 소년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신이 아찔하다. 바라보고 있자 하니, 막막해져만 갔다. 저를 공허함의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꾹. 소년이 손잡이를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쥐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코시로. 한동안의 정적 탓에 무거웠던 진공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는 그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지끈 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히고서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입니다, …타이치상.”
어디선가 나는 진한 꽃내음에, 소년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떠 보이며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보랏빛의 겹겹으로 쌓여져 조그마한 꽃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저 꽃은, 라일락임이 분명했다. 후각으로 전해지는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이 향기 역시, 라일락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확신을 더했다.
뚜벅뚜벅. 그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침구 옆의 수납공간에 놓인 조그마한 화분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화분에 저가 사온 것으로 추정되는 라일락을 예쁘게 꽂았다. 만족한 듯 병실을 둘러보던 그가 침대에 죽은 듯 뉘어있는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만큼 그의 눈빛은 애틋했다. 소녀의 손을 꼭 잡는 그의 손동작, 표정………. 그가 소녀에게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어떠한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또한,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참으로 비참하다 생각했다.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 히카리.”
분명 그가 소녀에게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그는 소녀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있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이러한 이유로 계속 자신을 탓했다. 그가 소녀에게 사과를 하는 동안,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자신이 밉다. 소년은 그저 손만 꼼지락거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히카리.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서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앞으로, 결코 그 어떤 것들도 감히 너를 건드리지는 못 할 거야. 금세 눈빛이 바뀌어서는 말을 하는 그를 보고,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움찔거렸다. 갑자기 몰아치는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꽤나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병실 창문이 힘을 못 이기고 활짝 열려 젖힌다. 창이 열림과 동시에 들어오는 먼지를 삼킨 바람에 눈이 아파 짧은 신음을 내며 소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소년이 눈을 떠 보였을 땐, 그는 어두운 밤에 어울리는 형체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년의 눈이 잠시 흔들리며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블랙 워 그레이몬.”
이내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소년의 동공은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까와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것 같은 초조함에 소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입술 깨물지 마, 흉 져.”
“……….”
“하여간 말 안 듣는 건 여전하다니까, 코시로.”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저를 대하는 모습에 소년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점점 시큰해져오는 콧잔등이 먹먹해져왔다.
“그만하면, 안 되는 건가요?”
“……….”
“멈출 수는 없어요?”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고요, 타이치상….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깜짝 놀란 듯 동요하던 그였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천천히 떠 보였다. 다시 침착한 상태로 돌아간 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다른 방법은 많잖아요. 이건 분명 히카리상도 원치 않을 일이란 것도, 다 알잖아.”
“…코시로, 나는.”
“대체 …왜, 왜. 우리가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소중하게 지켜왔던 곳을 파괴하고 있어요.”
“……….”
“왜 그러면서, …타이치상이 더 아파할 길을 가고 있냐고요.”
뚜벅, 뚜벅. 그가 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도,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로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이내 저의 밑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고, 그 그림자는 저에게 손을 뻗었다. 툭. 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는 손길에 소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울적함에 소년이 코를 훌쩍였다.
“미안해, 코시로.”
“……….”
“하지만 나는 이제 겁쟁이일 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
“타이치상이 겁쟁이라니, 무슨―!”
힘없는 목소리로 말해오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소년이 그가 한 말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지 대들며 언성을 높였지만, 그의 쓸쓸한 얼굴에 차마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을 이어했다.
“아구몬이 말이야. 왜 워 그레이몬이 아니라, 블랙 워 그레이몬으로 진화했을 것 같아, 코시로? 그리고, 에너지는 분명 바닥을 치고도 남을 시간인데 왜 그 뒤로 다시 안 돌아가는지. 알고 있어?”
“왜 그럴까 생각은 해 본 적은 있지만, 타이치상을 그 뒤로 본 적도 거의 없고, …확실한 이유는 모르죠.”
“…내가 용기를 잃어버렸거든. 이게 이유야. 그리고 돌아가지 않는 건 아마, 겁쟁이가 되어 버린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타이치상은 그 누구보다 용감했어요. 특히 모두를 생각하고 앞을 바라볼 줄 아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 많은 힘이 되어줬다고요.”
아아, 그랬나. 고마워, 코시로. 그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그의 미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미소가 진실 된 것이 아님을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소년은 한 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던, 나는 앞으로 멈출 생각이 없어.”
“타이치상!”
“네 말이 모두 맞아, 코시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결코 좋지만은 않아. 스스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
“그럼 왜―.”
“불공평하잖아.”
그 새끼들은 은혜도 모르고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내가 언제까지고 은혜를 베풀기만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코시로.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왠지 모를 소름에 소년이 몸이 굳어서는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 잠깐만요. 타이치상!”
어느새 다시 블랙 워 그레이몬의 어깨에 앉은 그는 소년의 애원 소리에 잠시 소년에게 눈길을 두었다. 하지만 이내 소녀에게 눈길을 돌려버리더니, 이제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는 그렇게 달을 향해 올라갔다.
소년이 급하게 창 쪽으로 달려가 고개를 빼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볼을 스치는 이 쓸쓸한 바람처럼, 그들의 뒷모습이 달빛을 받아 더욱 쓸쓸해 보임에 소년이 안타까움의 탄식을 자아냈다.
결국, 자신은 그를 설득하지 못 했다. 이의 애통함을 참지 못하고 소년은 눈물을 흘려보냈다. 긴장이 풀린 다리까지 더해져, 바닥에 주저앉고는 소년은 조용히 흐느꼈다. 소중한 소녀가, 저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에.
*
큰 파괴 음에 타이치가 무표정으로 귀를 막았다. 마을을 하나 파괴할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매우 시끄러웠다. 이젠 지겨워.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파괴되어 가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죽을 때 찍 소리도 못하고 죽어가는 생명들에 타이치는 공기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죽어도, 다시 알에서 태어나는 놈들이니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군. 하하. 미친 사람처럼, 혼자 실소를 터트려대는 타이치에게 블랙 워 그레이몬이 조용히 다가섰다.
“타이치, 발견했다.”
블랙 워 그레이몬의 말에 그의 몸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 그러다 이내 입가에 한가득 웃음을 담아 보이며 타이치가 말해왔다.
“어디 있어, 그 자식?”
아무런 말없이 앞장을 서 보이는 블랙 워 그레이몬의 뒤를 졸졸졸 따라가면서 타이치는 하늘을 바라봤다. 빛나는 것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어떻게 봐도 깊숙한 것이, 숨기에는 아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 장소였다. 어이가 없어 타이치가 짧은 실소를 터트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이 가장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는 디지몬에게 멈추었다. 시린 눈빛이 저에게 닿자 디지몬은 몸을 벌벌 떨었다. 아 그래, 너 거기 있었구나.
“널 찾았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죄송해요.”
저에게 깍듯이 사과를 해오는 디지몬에 타이치는 더욱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잖아. 그렇지? 너희, 선택받은 아이들이니까. 우리도 화를 풀 상대가 필요했던 것뿐이란 거, 아니까.”
지끈. 타이치는 두통이 오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한 그 날의 잔상이 괴롭다. 그런 타이치를 바라보며 블랙 워 그레이몬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타이치, 할게. 블랙 워 그레이몬의 날카로운 손톱이 들어 올려졌다.
“잠깐만.”
웬일로, 그런 블랙 워 그레이몬을 제지시키는 타이치였다.
*
긴 밤이 끝나고, 아침이 다시 찾아왔다. 소라는 어느 때처럼 히카리의 병실로 들어가려 문을 열었다.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짓고 병실 안으로 발을 내딛는데,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져서는 눈이 퉁퉁 부어있는 코시로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다.
“코시로군,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코시로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눈치채지 못 했던 소라가 어디선가 나는 향긋한 내음에 눈을 번쩍 떴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곳엔 연보랏빛 라일락이 아직은 생생한 기운을 보이며 달콤한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타이치, 다녀갔던 거야?”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코시로가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소라상.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내뱉은 코시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꽃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으로 꽃을 조심스럽게 쓸며 입을 열었다.
“라일락. 꽃말이 뭔지 밤 새 생각해 봤는데요. 꽤 많더라고요, 꽃말이.”
“뭔데, 그게?”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 친구의 사랑, 우애요.”
“…바보답네.”
저는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워하는 코시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소라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히카리가 탈 없이 깨어나기를 바라야지.”
“……….”
“히카리가 조금이라도 잘 못 되는 날에는, 그 바보 녀석, 우리까지 죽이려 할지도.”
소라가 농담으로 한 소리인 것을 암에도 코시로는 조금의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그저, 소라가 말했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며, 코시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히카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라일락과 묘하게 닮은 모습을 코시로는 천천히 저의 눈에 담았다.
“저는 그냥, 타이치상이 상처를 안 받았으면 좋겠어요.”
라일락의 은은함이 더욱더 퍼져갔다.
*
「Epilogue_끝, 그리고……….」
웬일로 블랙 워 그레이몬은 잔뜩 뿔이 나 있었다. 워 그레이몬도 아니고, 블랙 워 그레이몬의 모습으로 삐져서는 뾰로통한 모습은 타이치에게는 꽤나 낯설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지만, 녀석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자기의 말에 대답 안 하기는 블랙 워 그레이몬의 평소 모습과 똑같다는 생각에 그냥 자신이 착각한 건가 싶어 타이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제야 블랙 워 그레이몬이 입을 열었다.
“왜 그 녀석을 살려둔 거야, 타이치?”
“글쎄. 심경의 변화라던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타이치는 오래간만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혼자 남겨져 있는 편이, 더 괴로울 것 같아서. 내가 언제 죽이러 다시 자기에게 올지 모르는 그 불안한 상황 속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고립돼 있는 편이 복수라기엔 더 적합하잖아.”
*
‘타이치, 있잖아.’
“왜?”
‘그럼 이제 다시 돌아가는 거야?’
“……….”
‘모두들 널 기다리고 있어. 이제 복수는 끝났어, 타이치.’
“……….”
‘돌아가는 거지?’
“…아니.”
‘어째서?’
“혼자 남겨져 있는 편이 훨씬 괴로우니까.”
‘…타이치.’
“너에게, 그리고 죄 없는 친구들에게 나는 충분히 죄인이잖아.”
‘아니야, 타이치. 그렇지 않아.’
“…고마워, ―아구몬.”
“타이치,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글쎄. 어디든 상관없어. 가자, 블랙 워 그레이몬.”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6.01.15)
*수정(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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