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mon

지금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저의 머리가 기분 좋게 간지럽혀지고,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신난 목소리가 제 앞에 적나라하게 행해지는 TV소리아이들의 목소리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와 섞여 귀를 간지럽혔다. 거기에 내 등을 계속 툭툭 쳐대며 오오, 소리를 남발하고 있는 저의 오랜 친구 타이치까지. 평소 간지럼을 잘 타는 몸 때문인지, 타이치의 손이 닿는 내 모든 신체부위는 타오를 듯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이런 모든 요소 때문인지 심장이 근질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 야마토. 쟤 죽이지 않냐?”

 

, 그래………. 떨떠름하게 내뱉는 내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이치는 이내 다시 환호성을 터트리며 TV에 영혼을 팔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는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타이치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일 뿐인데, 오늘따라 달랐다.

 

야마토 너 오늘따라 이상하다?”

뭐가.”

아니 사내새끼가 되가지고 저걸 왜 안 좋아해? 나만 좋아하는 듯.”

 

이럴 거면 순진한 코시로를 꼬셔서 데려올걸 그랬어. 타이치가 팔짱을 낀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저의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나는 타이치의 말에 벙 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맞아.

 

평소와 다른 점.”

? 야마토, 방금 뭐라고 했냐?”

 

평소와 다른 점은 저 TV속에 펼쳐지는 영상이었다. 남녀의 두 나체가 훤하게 곡선을 이뤄가며 보이는. 타이치의 말대로 남자들이 좋아해서 환장하는 저 영상. 물론 의외의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난 의외의 경우였나?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상 야근을 달고 사셨기에 내가 혼자 집에 있을 때 저 영상과 같은 것들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때는 나 역시 타이치와 같은 반응을 보였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어이, 야마토?”

……….”

너 얼굴 토마토 같아. 큭큭. 아 진짜 웃기다. 사진 찍고 싶어.”

 

소파에 몸을 부대끼면서 껄껄 제 배를 부여잡으며 세상을 떠날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저 타이치가 내 눈에는 섹시하게만 비춰질 뿐이었다. , 아 진짜 웃기네. 어느새 타이치가 소파에서 내려와서는 몸을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더 심하게 웃으면 호흡곤란이 올지 모른다고 스스로 자각 한 것으로 보였다.

폴짝폴짝, 웃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타이치의 얼굴은 터질 듯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두근두근. 계속 흘깃흘깃 조금씩 타이치를 훔쳐보던 나는 간질이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타이치를 대놓고 바라보았다. 그러자 타이치의 볼을 따라, 또 목선을 따라 흐르는 땀이 눈에 띄게 들어왔고,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젠 간지러운 게 아니라,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내가 어쩌다 저 바보의 속셈에 넘어와 이 집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어이 야마토.”

……….”

나 배고파.”

 

저 원수 같은 놈은 지금 답답함이 이미 한참을 뛰어넘은 내 심정을 죽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아주 괘씸하다 못해 확 명치를 쥐어박고 싶었다.

 

아 가을인데도 덥네. 너무 심하게 웃어서 그런가.”

 

제발 내 앞에서 네 뽀얀 속살 드러내면서 옷 펄럭이지 말라고, 젠장……….

 

 

 

 

 

***

 

 

 

 

 

평소대로

 

 

 

야마타이

written by. 월화비월

 

 

 

 

 

***

 

 

 

 

 

야마토. 너 지금 뭐하냐? -타이치

 

평화롭던 주말 아침, 나는 핸드폰 알림 소리에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주섬주섬 핸드폰를 집어 내용을 확인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잠만 퍼 자다가 얼마 안 있을 밴드 공연에 대비해서 보컬 연습을 할 생각이었는데.’

 

대충 자다 일어났다고 답을 보내니, 얼마 안 있어 답장이 연달아 왔다.

 

그럼 별 일 없는 거지? 우리 집 와. -타이치

오늘 히카리 없거든ㅋㅋ –타이치

 

뭐라는 거야, 이 새끼는. 저의 동생이 집에 없는 것과 내가 놀러가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소리지. 나는 타이치의 말의 의도를 도저히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뭐 오늘 딱히 할 일은 없었으니까.

 

.”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잠에서 덜 깨 컬컬한 음성을 뱉으며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이때, 이 자식의 의도를 알았다면 내가 지금 고생을 안 하고 있었을 텐데. 아니. 의도를 알았었대도 나는 타이치의 집에 갔을 것이다.

 

아직도 드럽게 매운 카레만 해 먹냐, ?”

입 닫고 처먹기나 해.”

 

의도를 알았어도, 지금 이 두근거렸을 내 마음은 알지 못했을 게 분명하니까.

 

 

 

 

 

*

 

 

 

 

 

내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카레. 그것도 엄청 매운. 타이치는 그걸 먹으면서 후하후하, 하고 더운 입김을 뿜어냈다. , 억지로 안 먹어도 돼.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말리는 나를 타이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 그 눈빛에 내가 멈칫하자 타이치가 다시 우걱우걱 입 안 가득 카레를 퍼먹는다.

 

이걸 다 못 먹으면 꼭 너한테 지는 것 같단 말이야.”

?”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고등학생이란 나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초등학생 때랑 이리 변함이 없을 수가 있는지. 참 신기했다. 여전히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고, 또 여전히 유치한 아이였다, 타이치는.

 

타이치.”

?”

너 그거 다 먹으면, 축구보자.”

 

저거별로야, 하도 봐서 재미없어. 내 말에 꾸역꾸역 볼이 터질 듯 밥을 삼키던 타이치의 눈이 크게 확장이 돼서는 급하게 컵에 물을 따라 삼키기 시작했다. 밥을 다 삼킨 타이치는 재빠르게 내 손목을 부여잡으며 거실로 끌었다.

 

그래! 역시 남자는 축구지!”

 

여전히, 타이치는 축구 바보였다.

타이치의 손에 억세게 잡힌 손목 부근이 뜨겁다.

 

 

 

 

 

*

 

 

 

 

 

축구 채널을 찾는 타이치의 두 눈빛이 어느 때보다 더 반짝거렸다. 나는 그런 타이치를 바라보며 혼자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꼭 자리가 정해져 있듯, 언제나 타이치는 소파 위에,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앉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좁아터진 소파에서 자리싸움을 하지 않아도 됐다. 또 남자끼리 징그럽게 몸을 부대끼고 앉아있기는 싫다며 타이치나 코시로, 죠처럼 유치한 다툼을 피할 수 있었고.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 적나라한 영상을 볼 때와 같이 우리는 앉아있었다.

 

찾았다!”

 

어느새 재미있는 축구 영상을 나온 타이치가 신나서는 소리쳤다. 나는 타이치가 내 두 어깨를 흥분해서 두드리며 , 야 지금 완전 재밌는 때야!”하고 외칠 때마저도 맘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현재의 내 감정을 숨기기에 바빴다.

반응이 없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타이치는 쳇, 하며 내게 말을 거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방금도 타이치의 손길에 터져버릴 뻔했던 심장하며, 지금도 쿵쿵쿵 크게 울려서 타이치에게 들리지 않을까 겁나는 내 심장소리와, 핸드폰 화면에 비취는 벌겋게 익은 얼굴까지. 이건, 꼭 마치………. 내가 타이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여기까지 생각에 미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급했나. 라는 등의 타이치의 중얼거림은 내 안중에도 없었다.

 

화장실 세면대 쪽에 붙어있는 거울을 확인해보니,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럴 수가. 평소에 꼭 죽은 시체만큼이나 하얗다 못해 질려있던 내 피부는 완전히 빨갛게 익은 상태였다. 계속해서 더 빠르게 뛰는 이 심장에 숨을 쉬는 것도 어렵다. 모든 게 편치 않았다. 불편하다.

거친 숨소리가 화장실 안을 크게 울렸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 위험하다.

 

어이, 야마토! 곧 골 할 것 같아! 빨리 끊고 나오라고!”

 

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아. 얼굴을 두 손에 묻은 나는 그대로 한 동안 멈춰있었다.

지금 내 감정을 깨달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상태 그대로 나간다면 억지로라도 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해 버릴 것만 같아 스스로에게 덜컥 겁이 나는 것이 먼저였다.

 

 

 

………….

…………………. 이상하다. 이상하리만큼 밖이 조용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하고 외치고 있어야 할 타이치가 조용했다. 잠이라도 든 건가 싶어서 스스로 자제하자고 생각하며 용기를 낸 내가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보이는 타이치의 무언가에 집중하는 눈빛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조금은 풀린 것도 같아 보이는 타이치의 표정은 내게 어색하기만 했다. , 그 풀린 눈이 이만큼이나 섹시하게 보일 수 있는지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삐뽀삐뽀. 위험 경보음이 머릿속에서 울렸음에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꿀꺽. 깊게 침을 삼켰는지 타이치의 목젖이 크게 일렁였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은 채로 대체 어디에 그렇게 집중하는 건가 싶어 TV가 보일 위치까지 거의 도착한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대체 저건 뭐지. 축구에 영혼을 팔았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타이치가, 글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진하게 서로의 입술을 부비고 있는 장면을.

 

, 야마토………. 똥 잘 싸고 왔냐? 하하.”

 

어색한 공기가 우리 주변을 감돌았다. 나는 그저 눈만 끔벅끔벅 타이치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 제 자리에 앉았다. 아까 축구는 끝난 거야? 내 물음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타이치가 헤벌쭉,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게 말이야, 야마토. 변명을 하려는 타이치의 입이 오밀조밀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아까 그 축구도 드라마 내용 중 일부였나 봐. 골 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이 장면이 나와 가지고.”

……….”

절대 내가 다시 그 영상을 튼 게 아니라……….”

 

아씨 지금 내가 왜 이거가지고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지. 타이치가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인다. , . 더 이상은 힘들다.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다.

 

뭐야. 야마토?”

 

결코 내 의지가 들어간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참고 있었다. 허나 몸이 타이치에게로 끌리듯이 저절로 움직였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있던 내 몸을 어느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내 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쭉 빼고는 타이치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점점 다가갔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라고 타이치의 얼굴은 그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평소와는 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낀 타이치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나를 제지시키기 위해 내 두 어깨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당황함에 얼룩진 타이치의 얼굴을 보고도 알 수 있듯이, 타이치는 온전히 제 힘을 다 쓰지 못했다.

 

이봐, 야마토.”

타이치.”

너무 가깝다고, 어이……….”

 

내 거친 숨결과 타이치의 당황스러운 숨결이 공중에서 맞닿았다. 두 눈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본 적이 어릴 때 서로 뒹굴며 싸웠을 때를 제외하고 또 있던가. 나는 계속해서 너와 가까워지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는 내 의지가 깃들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내 의지였다.

1cm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타이치는 몸을 살짝 떨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목소리 역시 떨려왔다. 이 모든 게 내게는 자극적으로만 다가왔다. , 이렇게 말하니까 나 꼭 무슨 변태 같잖아.

소파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은 어느새 벽을 짚어 타이치를 내 품에 가두고 있었고, 타이치는 그곳에서 꼼짝달싹도 못했다. 그야 내가 녀석의 허벅지 위에 앉아 내 무게 때문에 다리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야마.”

 

내 이름을 부르려던 놈의 목소리가 끝을 맺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마지막 단어일 를 내 입안으로 삼켰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타이치의 두 눈이 엄청 커다래지다가도 끝없는 행위에 결국 풀려버린다. 아까 드라마를 보면서 집중했을 때 보다 더, 완전히 풀린 눈으로 타이치는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타이치가 숨이 막혀 날 떼어내려고 애를 쓸 때까지도, 나는 입술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하게 맞췄으면 맞추었지, 결코 멈출 생각은 없었다. 잔뜩 흥분한 내게 타이치를 위한 배려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내 머릿속은 타이치로 가득했다. 타이치, 타이치. 너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네게 입을 깊게 맞추고 있음에도 나는 더욱 더 너를 갈망했다.

 

다녀왔습니다.”

 

결국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타이치의 동생인 히카리가 집에 들어 올 때 까지 마저도 내가 멈추지 않자 타이치는 내 혀를 콱 깨물었다. 이에 반사적으로 타이치에게서 멀어지며 나는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비릿함이 입 안에 감돈다.

 

? 형이 왜 여기 있어?”

 

집에 온 게 히카리만이 아니었다. 밖에서 히카리와 우연히 마주친 모양인지, 겸사 겸 내 동생인 타케루가 놀러온 모양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아, 하고 탄식을 내뱉자 타케루와 히카리는 나와 타이치를 서로 번갈아보았다. 무언가 우리 사이에 알 수 없는 공기를 알아챘는지 서로 눈치를 본다.

그야 그럴 것이, 타이치는 입술을 부비며 나를 잔뜩 노려보고 있고, 내 입가에서 뗀 손에는 조금의 혈흔이 묻어 나와 있었으니, 의심하기엔 충분했다.

 

혹시 둘이 또 싸운 거야?”

 

괜히 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묻는 히카리에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싸운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 컸으니.

 

, 맞아.”

 

한동안 집에 무겁게 깔려있던 침묵을 깬 건 의외로 타이치의 목소리였다. 먼저 정적을 깨는 건 타이치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 했던 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타이치를 빤히 바라다봤다.

 

방금 저 망할 야마토가 내가 좋아하는 축구선수 욕을 했어.”

 

그러자 타이치가 지그시 내 눈을 맞추며 어서 자기의 말에 동조하라는 듯 말해왔다. 이에 멍 때리던 나는 화들짝 몸을 어떻게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괜히 오바해가며 외쳤다.

 

, 맞아! 내가 그래가지고 쟤가 내 볼을 주먹 갖다가 쳐서 피가 났어!!”

 

내 말을 히카리와 타케루는 그다지 신뢰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우리가 싸웠다는 것 밖에 없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듯 보였다.

 

오늘 타이치상 얼굴도 볼 겸 온 거였는데, 상황이 좋지 않네. 그냥 가봐야겠다.”

그러게. 미안해, 타케루군.”

아냐, 히카리짱은 아무 잘못도 없는 걸.”

 

,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같이 가자. 타케루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고, 나는 어어,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타케루의 손에 이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타이치가 그 뒤로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애꿎은 제 입술을 꾹 물은 채로 입을 다물었으니. 죄 지은 내가 더 이상 이 집에서 나가지 않을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상황은 흐지부지, 마무리도 짓지 못하고 끝났다.

 

오늘 있었던 일 없던 셈 쳐줄 테니까, 이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안 했으면 좋겠어. -타이치

야마토 네가 거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한다면, 더 이상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솔직히 없다. -타이치

 

더욱이 타이치의 문자로, 나는 이에 대해 그 어떠한 언급조차도 하지 못했다. 비록 내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놈의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슬픈 일이었으니까.

 

 

 

 

 

*

 

 

 

 

 

아 야마토 망할! 그거 내가 숨겨 놓은 빵이었단 말이야!”

그랬나? 미안.”

뱉어, 뱉으라고! 당장 토해내, 이 멍청아!”

? 이 바보 같은 게!”

 

아 둘 다 그만 좀 싸우세요! 시끄럽다고요!”

 

우리는 어느 때처럼 유치하게 싸웠다. 오늘은 학교 컴퓨터실에 있는 서랍에 있는 빵을 내가 주인이 잊고 간 지 알고 아무렇지 않게 먹은 일 때문이었다. 내가 맛있게 빵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타이치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여기에 나도 발끈해서는 서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참다못한 코시로가 작업하던 것을 멈추고 소리쳤다. 그것도 책상을 쾅, 소리 나게 내려치면서.

 

, 코시로. 너 요즘 막나간다?”

진짜 제가 막나가기 전에 그만 두시죠.”

 

타이치의 장난기 잔뜩 묻은 목소리에 코시로가 예민하게 받아치자, 타이치가 저의 심장을 부여잡으며 헐 상처.”하고 중얼거렸다. 진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소라가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래도 오늘은 저 망할 야마토가 잘못한 일이었다, !”

아오 씨, 그깟 빵 내가 다시 사오면 될 거 아니야!”

 

얄밉게 내민 주둥이를 진짜 주먹으로 퍽 쳐버리고만 싶다. 우리는 그 후로 이랬다. 내가 타이치에게 돌발적인 행동을 한 지 일주일 후, 우리는 평소와 변함없이 지내고 있었다. 자주 싸우던 이유가 유치해졌으면 더 유치해졌지, 어색한 공기 따위는 감돌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이라도 어색할지 알았는데, 타이치는 그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뭔가, 다행스러우면서도 씁쓸해졌다.

 

내 마음이 변했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저 원수, 바보 같은 타이치가 좋았다. 하지만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해지면 안됐다.

 

소라, 야마토 좀 때려줘.”

내가 미쳤니? 제발 너희의 유치한 싸움에 날 끼어들게 하지 마.”

 

꼭 타이치의 그 문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뭐, 여러 가지 의미로.

 

아슬아슬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타이치와의 관계는. 그쪽에서는 몰라도, 일단은 내 쪽에서. 다시 한 번 이 감정이 터져서 폭발해버린다면, 내가 다시 타이치에게 억지로 행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친구로 남아있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슬아슬하다.

이 아슬아슬함은, 내가 감정은 언제까지 숨기고 참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지.

 

내 착잡한 기분과는 다르게 오늘의 날씨는 맑기도 엄청 맑았다. 구름 한 점 안 보이는 푸른 날씨라니.

 

, 소라! 너와 나의 우정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얘가 오늘따라 왜이래!”

 

정말 최악이다.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11.12)

*수정(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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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mon

- 이 글은 트위터의 '누굴까' 님 께서 [코시미미 / 코시로가 무심해서 싫다 하소연 하면서도 좋다고 하는 미미] 를 요청한 글 입니다.

- 따로 txt 파일을 만든 글이니, 소장하고 싶으시다면 이메일 주소를 덧글, 혹은 트위터로 알려주세요.:D
('누굴까' 님이 아닌 다른 분이 원하시는 거라면 '누굴까' 님께 꼭 허락을 맡은 뒤 알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심하더라도

 

 

─코시미미

 

written by. 월화비월

 

 

 

 

§

 

 

 

 

“으아앙―.”

“이제 그만 울어. 응? 무슨 일인데, 미미. 이렇게 울면 너 쓰러져.”

 


소라언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멈추려던 눈물이 더 쏟아져 나왔다. 내가 울면 울수록 소라언니 나를 걱정해주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소라언니에게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집에 찾아오고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소라언니에게 안겨 바로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내가 어이없기도 하고, 많이 당황하기도 했을 텐데 곧바로 “괜찮아, 괜찮아.” 라는 말을 하면서 내 등을 토닥여주고, 위로를 해주는 소라언니에 의해 나는 더 아이같이 엉엉, 하고 울어댔다. 점점 도를 넘어서 우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소라상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소라언니….”

“응, 왜 그래 미미?”

“코시로 군, 코시로 군 그 나쁜 놈이! 으앙―.”

 


또 왜 울고 그래, 미미! 말을 하다 말고 다시 내가 눈물을 흘리자 당황하는 소라언니였다. 소라언니는 복도는 추우니까 이제 그만 방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아직도 안겨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왔고, 음료수를 가지고 올 테니 여기 앉아있으라는 말을 하며 바닥에 방석을 깔아주었다. 미안해요, 소라언니. 소라언니는 풀이 죽어서 사과를 하는 나를 보더니 밝게 웃어주며 괜찮다고 답했다. 으, 완전 감동이야. 역시 소라언니 뿐이라니까! 그렇게 얌전히 방석에 앉아서 소라언니를 기다리니, 소라언니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고, “자, 여기.” 하며 내게 컵을 건네주었다.

 


“아, 고마워.”

“그럼 이제 얘기해봐.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나 정말 이제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응? 무슨 소리야?”

 


소라언니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물었다. 소리언니의 질문에 내가 제대로 된 답도 안 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자 소라언니가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소라언니의 손이 너무나도 따듯해서, 살짝 용기가 난 내가 입을 열었다.

 


“코시로 군을 이제 내가….”

 


하지만 그 뒷말은 전혀 나오지를 않았다.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이제 이 말만 하면 되는데,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내 진심은 ‘포기하기 싫어.’ 여서 그런 걸까. 또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에 울지 않으려 애꿎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참아, 참아야 돼. 그 자식 때문에 천하의 미미가 운다니, 웃기지도 않아.’ 라고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미 차오른 눈물을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눈물을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흘리며 어깨를 조금씩 들썩거렸고, 소라언니는 그런 내가 질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눈빛은커녕 나를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라언니의 그 눈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나를 걱정하는 이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치기 싫어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래, 말 하는 거야. 할 수 있어.

 


“소라 언니, 나 이제 코시로 군을….”

“……….”

“코시로 군을, 포―.”

“미미.”

 


어, 어? 나는 지금 바보 같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라언니는 다른 사람의 말을 끊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지금 소라언니가 내 말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소라언니는 그런 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진심이 담기지도 않은 말은 하지 마. 코시로 군을 포기 할 거야. 라는 말은 네 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았어?”

“아까도 울면서 코시로 군 이름을 말 했잖아? 그리고 지금 딱 보이는 걸. 네 몸이 거부 반응 하는 거.”

“눈치도 빠르셔.”

“너랑 알고지낸지가 언젠데.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데?”

 


소라언니의 직설적인 물음에 대답을 해 주려 그 때 일을 생각하는데, 순간 욱 하고 다시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소라언니는 그런 나를 진정시켜주려 한 건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코시로 군은 나를 귀찮아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언니도 알잖아. 내가 누구 때문에 미국에 계시는 부모님 두고서 혼자 여기서 지내는지. 코시로 군을 잊어보려고 이 남자, 저 남자 사겨 봐도 결국 끝엔 코시로 군이어서.”

“……….”

“그래서 딱, 고등학교에 올라갈 나이가 되자마자 혼자 여기에 와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고 있는 거잖아. 나는 많이 노력했어. 매일 같이 코시로 군 집에도 찾아가 보고, 코시로 군에게 나를 어필시키려고 해 보고, 학교에선 같은 반도 아니면서 항상 찾아가 말도 걸어보고 했는데!”

“미미….”

“그럼 뭐해. ―코시로 군은 날 전혀 봐주지 않는 걸.”

 


나 이제 정말 지쳐, 소라언니. 결국 다시 눈물은 내 뺨을 타고 흘러 내려가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끅, 끅 울음소리를 참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소라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정말 창피하다. 대체 뭐하는 거야, 나는.

 


“미미.”

“미안해, 소라언니. 나 정말 바보 같지, 헤헤. 여기서 소라언니한테 뭐라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일부러 괜찮은 척을 하면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말끝을 늘렸지만, 역시 소라언니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소라언니는 바로 알 텐데. 더 이상 폐 끼치면 안 되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나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나를 따라 같이 일어나는 소라언니였다. 나는 그런 소라언니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나 이제 가 볼게.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소라언니.”

“미미, 괜찮아?”

“응, 완―전 괜찮아!”

 


집 까지 안 데려다 줘도 괜찮겠어? 소라언니가 신발을 신고 있는 내게 물었다. 한 겨울이라 그런지 아직 6시 밖에 안 됐는데도 밖은 어두컴컴했다. 으, 어두운건 싫은데. 내 표정을 본 소라언니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 봤다. 소라언니의 눈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내가 벌떡 일어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혼자 갈 수 있어!” 하고 당당히 외치자 “정말?” 하고 다시 되묻는 소라언니였다. 당연하지, 혼자 갈 수 있다니까? 그것보다 언니도 여자면서 나를 데려다 주긴 뭘 데려다줘? 하고 장난스런 말투로 내가 말하자, 소라언니가 웃음을 터트리며 “조심해서 가” 하고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소라언니네 집에서 점점 멀어지려는데 소라언니가 “미미!”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자리에서 멈춰선 내가 뒤 돌아 소라언니를 보자, 소라 언니는 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힘내, 미미!”

 


소라언니의 말이, 진심이 내 마음 속 깊숙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나를 걱정해주는 소라언니에게 너무 고맙고, 고마워서 소라언니를 보며 정말 환하게, 활짝 웃어보였다. 항상 고마워, 소라언니.

 

 

 

 


§

 

 

 

 


“꺅!”

 


무언가 내 앞을 재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 무서워서 눈을 꽉 감은 채 비명을 질렀다. 으으, 뭐야, 뭐냐고! 아무리 무섭다지만 집에는 가야했기에 공포감을 억누르고 눈을 조금씩 떠보이자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야옹”

 


고양이였다. 아, 뭐야 고양이잖아. 하는 안도감에 숨을 푹 내쉬었다. 자, 이제 다시 가볼까! 하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기도 잠깐, 나는 다시 무서워져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경계하며 걷기 시작했다.

 


―.


그렇게 걷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귀 기울여 들으니, 내 걸음 소리에 맞춰 걷는 꽤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뒷사람이 눈치를 못 챌 정도로만 살짝 고개를 돌려 살피니, 가로등 빛에 길게 늘여진 그림자가 보였다. 그 사람은 내가 걸음을 재빠르게 하면, 자기도 재빠르게 했고, 내가 걸음을 느리게 걸으면 자기도 느리게 걸었다.

이쯤 되니 머릿속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어떡해? 공포감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추위에 몸이 덜덜 떨리는 건지, 무서워서 그러는 건지도 나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확실한 건, 지금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골목길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매우 바보 같은 짓이었기에,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내가 빠르게 뛰어가자 뒷사람도 빠르게 쫓아왔고,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달리는 걸 멈추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뛰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시내야. 조금만 더! 하는 희망을 놓지 않은 채 그렇게 뛰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아, 이제 망했구나. 하는 생각에 앞으로 닥칠 상황을 각오하며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를 따라오던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라. 여기서 그냥 다시 한 번 도망갈까, 생각했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를 따라오던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체취가 났기에.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 내내 생각한 사람의 체취가. 평소에 나라면 누군가 쫓아왔을 때 무서워 그 자리에서 바로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포기했을 테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냄새가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용기를 내 눈을 살며시 뜨니,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나를 따라오던 사람이 아니었다. 내 어깨를 붙잡고 숨을 힘겹게 고르고 있는 이 사람은, 내가 많이 보고 싶었던.

 


“…코시로 군.”

 


―코시로 군이었다. 코시로 군은 내가 저의 이름을 부르자 숨을 고르다 말고 나를 바라봤다. 정말 코시로 군이구나. 코시로 군을 보니 안심이 돼서 그런 걸까, 지금까지는 괜찮았던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고,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 한 나를 붙잡아 자기에게 기대게 하는 코시로 군이었다. 코시로 군에게 안긴 꼴이 되어버렸지만….

이젠 나, 코시로 군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 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훌쩍 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안겨있으니 그게 정말 많이 와 닿았다고나 할까. 옛날엔 나보다 작았는데, 이젠 이렇게 훌쩍 커버렸구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코시로 군이 나보다 컸다는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 긴장이 풀려서 눈물이 나기도 했고, 내가 코시로 군을 꽤나 오랫동안 좋아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나왔다.


코시로 군은 내가 우는 걸 눈치 챈 건지 아무 말 없이 두 팔로 날 감싸 안았다. 한 손은 내 머리를 받치고, 또 다른 손은 내 허리를 받치고. 코시로 군의 행동에 놀라 울다가도 눈을 크게 떠보였다. 쿵쿵 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코시로 군에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나는 지금 많이 설레고 있었다.

코, 코시로 군? 왜 그래? 내 물음에 코시로 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 얼굴은 이미 잔뜩 빨개져 있을 것이 분명했고,  더 이상 코시로 군에게 안겨있다가는 심장 마비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몸을 뒤로 빼려는데, 코시로 군은 나를 그대로 꽉 안고 놓지 않았다.

간신히 코시로 군의 품에서 빠져나온 내가 웃으며 코시로 군에게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코시로 군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잔뜩 화난 표정을 하고 있는 코시로 군이었기에. 이런 표정을 하고 있는 코시로 군은 낯설었고, 뭔가 무서웠다. 코시로 군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버럭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체 미미 상은! 여태 집에 안 가고!”

“………”

“소라 상한테 연락 받고 제가 얼마나…! 집에 가는 길에 잔뜩 골목이 있는 걸 알면서 위험하다는 생각 못 했어요? 대체 왜!”

“…코시로 군.”

“연락을 받지 않는 미미 상을 미친 듯이 찾으러 다니고, 쉬지도 않고 뛰어다니면서 간신히 미미 상을 찾았을 때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을 보고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요!”

 


코시로 군은 정말 많이 화가나 있었다. 코시로 군이 내게 소리 칠 때마다 놀라서 움찔거렸지만 왠지 기뻤다 라고나 할까,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코시로 군이 지금 화내는 건 오로지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거였기 때문에. 어두운 밤길에 나 혼자 가게 둔 것이 마음에 걸렸던 소라언니가 코시로 군에게 연락을 한 모양인데, 소라 언니의 연락을 받고서 옷도 제대로 안 걸치고 뛰쳐나온 코시로 군을 보니 내게도 조금은 희망이 생긴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코시로 군은 그런 나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제발. 사람 걱정 시키는 일 생기게 하지 말라고요.”

 


아까 소라언니네 집에 찾아 갔을 때 까지만 해도 이 마음을 포기할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못하겠어. 나는 코시로 군을 보며 히죽 웃고는 냅다 코시로 군에게 안겨들었다. 내 행동에 당황한 코시로 군이 나를 떼어내려 했고, 나는 그럴수록 코시로 군을 더욱 꽉 껴안았다. 코시로 군은 끈질기게 안 떨어지는 나를 포기한 건지 가만히 서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즐겼다. 정말 좋다, 코시로 군.

 


“어, 언제 떨어질 생각이에요?”

“음, 글쎄.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안고 있으니까 따듯하지, 코시로 군?”

“에?”

“고마워. 나 걱정돼서 급하게 나오다가 제대로 옷도 못 걸치고 나온 거지? 미안해.”

 


그렇게 한동안을 코시로 군의 품에 서있었다. 코시로 군의 심장 소리가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왠지, 나처럼 빠르게 뛰고 있다는 착각을 해 버렸지만. …아, 맞아. 코시로 군 지금 추울 텐데! 나는 코시로 군을 빨리 집에 보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서야 코시로 군의 품에서 나와 얼른 집에 가라는 말을 했고, 코시로 군은 나를 집 까지 데려다 준다며 고집을 피웠다. 빨리 안 가면 감기 걸릴 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  보자, 코시로 군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우리 집에 가죠. 미미 상 집 보다 우리 집이 가깝기도 하고, 옷 제대로 입고 미미 상 집까지 바래다 줄 테니까.”

“너, 너희 부모님 있을 거 아니야!”

“오늘 두 분 다 약속 있어서 집에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아, 그래….”

 


그럼, 가죠. 코시로 군은 그렇게 말을 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코시로 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으앗!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한 내 팔을 잡아주는 코시로 군 덕분에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서있을 수 있었다. 아, 고마워. 내 인사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걷기 시작하는 코시로였다. 대답이라도 좀 해주지. 나는 괜히 삐져선 코시로 군 쪽을 보지도 않고 걸었다. 하지만 곧 난 내 손에 전해져 오는 온기에 깜짝 놀라 코시로 군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에, 엣?”

 


적잖이 당황해 이상한 소리를 내는 나를 보지도 않고, 코시로 군은 살짝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말했다.

 


“…또 덜렁대다가 넘어지려고 할 까봐 잡는 거예요.”

 


코시로 군이 먼저 내 손을 잡아 주는 건 처음이여서, 놀란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뛸 뿐이었다.  추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새빨개져 있는 코시로 군의 볼을 보고 나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볼이, 나처럼 설레서 빨개진 거면 좋을 텐데. 아니겠지?

 

 

 

 


§

 

 

 

 


코시로 군의 집에 도착한지 한참이 지났지만 코시로 군은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온 문자에 깜짝 놀라고는 내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 노트북만 붙잡고 있은 지가 벌써 한 시간 전이었다.

이미 노트북에 정신이 팔린 코시로 군은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내가 자기 방에 같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 어떻게 집에, 그것도 방에 여자랑 단 둘이 있는 걸 신경도 쓰지 않는 거야? 복받쳐 오는 감정에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만 꽉 쥐었다. 역시 나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걸까. 어느새 나는 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되게 많이 우네. 하필이면 그때, 우연하게도 뒤를 돌아본 코시로 군이 우는 나를 보게 됐고, 깜짝 놀란 코시로 군은 하고 있던 노트북도 내버려두고서 재빨리 내게 다가왔다.

 

“왜, 왜 울어요. 미미 상, 무슨 일 있어요?”

 


잔뜩 당황하고선 우는 날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곤란해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금세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항상 이랬다. 코시로 군을 좋아하고 나서는 코시로 군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분이 울적해지기도, 좋아지기도 했다. 꼭 조울증 있는 사람처럼.

그래. 코시로 군이 그냥 무심한 게 아니란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심한 게 아니라, 무언가에 집중을 하고 빠져들면 한동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 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운했던 거야, 나는. 코시로 군이 우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는 것 자체로도 내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란 걸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인데, 이걸로 만족하지 못한 내가 너무 욕심쟁이였던 게 아닐까. 거기다 지금은 노트북까지 버려두고서 나한테 온 건데.

나는 충동적으로 코시로 군의 옷깃을 잡아 내 쪽으로 끌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코시로 군은 그대로 내 쪽으로 끌려왔고, 나는 눈을 감으며 곧 내 입술에 닿을 입술의 감촉을 느꼈다.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이 좋았다. 코시로 군에게도 내 온기가 느껴지겠지.

 


“……….”

 


다시 천천히 눈을 뜨며 내 입술을 코시로 군의 입술에서 떼어내자, 코시로 군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코시로 군과 내 눈을 마주보고 한동안 있으니, 이내 코시로 군의 눈이 똥그랗게 떠졌다. 이제야 방금 일어난 일이 제대로 실감이 나는 건지 “우악!”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잔뜩 붉힌 채 한쪽 팔로 저의 얼굴을 가리며 내게서 뒷걸음질을 치는 코시로 군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 귀여워라.

 


“미, 미미 상 방금 무슨…!”

“좋아해.”

 


더 이상 이 벅찬 마음을 숨기기 싫어졌다. 사실은 나에게 반하게 해서 코시로 군이 먼저 내게 고백을 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없었다.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벅차오르는 이 설렌 마음을, 코시로 군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이 마음을, 더 이상은 친구로서 곁에 있기 싫은 이 감정을,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갑작스런 내 고백에 놀란 건지 코시로 군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코시로 군은 빤히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이 감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좋아해.”

“……….”

“좋아해, 코시로 군.”

 


이 고백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걸로 충분했다. 지금 내가 코시로 군에게 아주 많이 소중한 사람일 거라는 확신을 가진 이상, 앞으로 몇 번이고 고백을 해서 나를 바라보게 할 자신이 있었다. 당장 오늘 답을 듣지 못 하더라도, 나는 충분했고, 괜찮았다.

 


“……….”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고선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얼굴을 다 가려버리는 코시로 군이, 차마 가리지 못한 새빨개진 귀를 본 걸로 나는 이미 만족한 상태였다. 충분히 코시로 군이 지금 내 고백에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나를 여자로 봐왔던 거라는 걸, 내게 희망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아주 많이, 좋아해.”

 


코시로 군이 살짝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땐, 그 어떤 때보다 더한 벅찬 설렌 감정이 날 찾아왔고, 나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아 활짝 웃어보였다. 네가 많이 좋아. 좋아해, 코시로 군.

 


아마도 너를 좋아하는 이 감정은, 커지면 커졌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거야.

무심한 너라도 이미 난 너에게 푹 빠져버렸으니까.


―부디, 내가 더 많이 지치기 전에 내게로 와 주기를 바라.

 

 

 

 

.

 

 

.

 

 

.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4.12)

*수정(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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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mong Kim' 님이 아닌 다른 분이 원하시는 거라면 'Enmong Kim' 님께 꼭 허락을 맡은 뒤 알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미미가 외국으로 간 시점은 제가 임의로 추측해 정한 설정입니다. (원작에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 갔다는 말이 없어요.)

 

 


*여름

 


─코시미미

 

written by. 월화비월

 

 

 

 


§

 

 

 

 


엑, 코시로! 너 진짜 이러기야? 타이치의 성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에 코시로는 “죄송합니다, 타이치상―!” 하며 입에 피자를 쑤셔 넣었다. 타이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억지로 피자를 먹어대는 코시로를 걱정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욱!”

 


아니나 다를까, 다른 아이들이 걱정하던 예상과 딱 맞게도 코시로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화장실로 직행했다. 코시로가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들리는 “우웨엑!” 소리에 아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전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럴지 알았다니까. 소라가 이마에 저의 손을 얹으며 말했고, 다른 아이들은 공감한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타이치만이 혼자 “내 아까운 피자!!―” 하고 외치며 난리를 피워대고 있을 뿐이었다.

 


“쟤는 언제 철들까 몰라. 히카리짱이 더 고생하겠네.”

“괜찮아. 오빠가 저러는 거 이젠 익숙하니까!”

“…히카리 너 까지!”

“미안, 미안. 그래도 오빠가 아직 철 안 든 건 사실이잖아?”

“……….”

 

히카리와 소라의 대화에 타이치가 금방 풀이 죽어서는 야마토한테 다가갔다. 야마토가 ‘얜 뭐야?’ 하는 표정으로 타이치를 쳐다보자, 타이치는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한 채 “야마토! 같이 동생을 둔 사람으로서 나를 위로해줘!” 라고 야마토의 어깨에 저의 얼굴을 파묻으려 했지만, 야마토는 마치 벌레를 볼 때의 얼굴로 미친 듯이 기겁을 하며 “꺼져!” 하고 타이치에게서 멀리 달아났다. 그 둘의 모습은 시트콤보다 더한 웃음을 유발했기에, 아이들은 모두 배꼽 빠지랴 배를 부여잡은 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야마토와 타이치가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을 때 화장실에서 나온 코시로는 입가에 작은 호선을 그렸다.

 


“아, 코시로군 이제 속은 좀 괜찮아?”

 

어느새 저의 옆에 서 있는 코시로의 인기척을 느낀 소라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코시로는 이젠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항상 그랬는걸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라상.” 라며 답하고는 어느새 싹 비워져있는 피자 판에 시선을 옮겼다. 뭔가 씁쓸해 보이는 코시로의 표정에 소라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코시로군은 뭘 그렇게 또 피자를 억지로 먹어? 항상 다 같이 밥 먹고 후식 겸 시킨 피자는 꼭 두 조각을 먹으려 한다니까―.”

 


소라의 말에 코시로가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대답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하고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나눠 먹을 땐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

“에? 뭐를?”

“…아니 뭐. 아니에요, 소라상.”

“뭐야, 싱겁기는.”

“오늘따라 더 아쉽네요.”

“……….”

“이제 서로 아파할 것도, 다칠 것도 없고, 소중한 이가 죽는 걸 안 봐도 되는 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같이 보낼 수 없다는 게.”

 

 

 

 


§

 

 

 

 


― 역시 우리끼리 모였을 때 후식으로는 피자가 딱 이라니까?

― 그야 당연한 걸. 타이치 너랑 나, 그리고 야마토군, 토시로군, 미미짱, 죠 선배, 타케루군, 히카리짱. 이렇게 여덟 명이잖아?

 


코시로는 한참을 컴퓨터에 열중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눈을 감고 의자에 저의 몸을 기댔다. 그러자 바로 떠올려지는 그 여름날의 기억에 코시로는 입가에 좋은 호선을 그리다가도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담았다.

 


“치사하게 모험이 끝나자마자 떠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다음엔 바로 도망치기나 하고.”

 


결코 코시로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건 모험이 끝난 여름날의 기억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녀는 여름날의 더위가 끝나자마자 모두의 곁에서 떠나버렸다. 감히 쉽게 다가가지 못할, 아주 먼 곳으로. 그녀도 외국으로의 이민을 원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녀가 위험한 곳으로 칭해지는 일본에 더 이상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난 그녀는 다행히도 2년 뒤 다시 일본으로 왔다. 물론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닌 놀러온 것뿐이었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코시로 또한 행복해했다. 특히나 그녀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여름날의 더위가 코시로에게 느껴지는 듯 했다. 코시로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치 더위를 타는 사람처럼 그녀를 보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여름보다 더한 더위를 느끼며, 결국 그 감정을 확인 했을 때―

 


― 미안. 아직은 안 되겠어, 미안해 코시로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코시로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다가간 걸 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코시로는 달아오른 분위기를 한 번에 망쳐놓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겠어요. 미미상이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하며 조금은 놀란 그녀를 달래줄 뿐이었다. 그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다시 외국으로 떠난 지 3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코시로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여전히 보고 싶어요.”

 


어느새 모니터 화면 가득 떠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코시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얼마나 더 오래 기다리게 할 셈이에요? 이러다 진짜 죽겠네.”

 


뭐, 그래도… 미미상이니까. 응.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나.

 

 

 

 


§

 

 

 


“오빠, 오빠! 대체 언제까지 잘 거야! 오늘 어떤 날인지 잊었어?”

“…히카리. 오빠 오늘 밤새도록 야마토랑 게임으로 승부했으니까 좀 봐줘.”

 


히카리의 조금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타이치 방 안 가득 크게 울렸다. 이에 타이치가 잠에 푹 잠긴 살짝 갈라져있는 목소리로 더 자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히카리는 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타이치를 깨울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간신히 몸을 일으킨 타이치는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샤워를 하려던 타이치는 아까 잠결에 들은 히카리의 말의 의미가 궁금해 바쁘게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히카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히카리, 아까 무슨 말이야? 오늘이 어떤 날인데?

 


“하아? 오빠 진짜 바보? 오늘 그 날이잖아! 미미상이 오는 날!”

“…벌써? 그게 오늘이었나.”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마중 나가야지. 이래봬도 3년 만의 재회잖아.”

 


히카리의 말에 타이치는 곤란한 얼굴로 저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음, 있잖아 히카리. 타이치가 계속 뜸을 들이자 히카리는 답답한 지 타이치를 재촉했다. 히카리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푹 내쉬며 타이치가 말했다.

 


“우리, 오늘 미미짱 마중 안 나가기로 했어.”

“…에? 어째서?”

 


타이치의 말에 히카리가 진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타이치가 히카리의 머리를 쓰담으며 대답했다.

 


“둘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소라가 우리끼리는 나중에 보자고 했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오빠.”

“응?”

“머리 다 망가지잖아! 손 치워!”

 


엑, 히카리 진짜 너무 변했어! 타이치의 눈물 섞인 외침을 히카리가 무시하는 것으로, 조금은 소란스러웠던 야가미 집의 아침은 끝이났다.

 

 

 

 


§

 

 

 

 


날씨는 쌀쌀하다, 라고 단정 짓기 어려울 만큼 추웠다. 겨울의 싸늘함이 아직 감도는 겨울과 봄의 사이, 딱 그 정도였다. 저가 내뱉은 입김이 아직 희미하게 보이는―. 이런 추운 날씨에 코시로는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데에 다리가 아픈지 벽에 저의 몸을 기대고 있는 코시로는 지나가던 여자들이 ‘훈남이네~.’ 라고 생각할 정도로 옛날과는 많이 변해있었다. 중학교 시절 때 까지만 해도 미미와 거의 비슷할 정도의 키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코시로는 어느새 훌쩍 자라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공항에서도 꿀리지 않았다. 가만히 핸드폰을 하던 코시로는 저의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고는 저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꽤 커 보이는 남자들이 지나가도 앞이 훤히 보였다. 이 사실이 신기한지 코시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타이치상하고 야마토상을 볼 때 예전보다 목이 덜 아팠던 것 같네.’

 


자기가 컸다는 걸 깨달은 코시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더욱 코시로는 미미와 재회하는 것이 기대가 됐다. 콩닥콩닥, 설레는 심장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오후 5시, 일본 도착 예정 시간! 다들 보고 싶어!」

 


코시로는 메일 내용을 떠올리고는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느새 4시 50분을 향해있는 시간에 코시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이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오빠 아직도 자는 거야? 아까 씻고 깬 거 아니었어?”

“방학이니까.”

 


한껏 나른해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타이치에 히카리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어, 오빠.

 


“벌써 5시네. 지금쯤이면 만났겠지?”

“그렇겠지. 아아, 히카리. 추우니까 문 닫아.”

 


조금은 설렌다는 얼굴을 하고 말하는 히카리를 처참히 무시하고 저의 말을 하는 타이치에 의해 히카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터트려버렸다. 타이치의 등에 올라타고는 다리를 쭈욱 잡아당기는 히카리에 타이치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악! 아파, 아프다니까 히카리!”

“오빠는 더 아파도 싸!”

 

 

 

 


§

 

 

 

 


“코시로군?”

 


코시로는 낯익은 목소리가 저의 이름을 부르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로 보이는 그리워했던 그녀의 모습에 코시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절로 탄성을 나오게 할 만큼 아름다워진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코시로군. 하고 미소 짓는 그녀에 코시로 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미미상.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둘은 서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금세 어색해진 분위기에 코시로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입을 열려하는 찰나에, 코시로의 볼에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느꼈다 사라졌다. 방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 듯 코시로는 멍하니 미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미는 두 볼을 수줍게 붉힌 채 코시로와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코시로군.”

“…미미상?”

“이제 도망치지 않을게. 미안했어.”

 


여전히 당차고, 또 순수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는 지금 코시로를 설레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미미의 말에 코시로는 입가에 호선을 그려보였다. 지금, 미미상 허락 한 거예요. 코시로는 그대로 미미의 붉게 물들어진 뺨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저에게 다가오는 코시로에 의해 미미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저의 코앞에 다가온 코시로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 감아요.”

 


코시로의 말에 미미는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자신의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결국, 자신이 다 다가가기도 전에 맞닿은 입술에 조금 놀랐는지 코시로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도 코시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미미의 입 안을 파고들며 좋은 감촉을 느끼려 애를 썼다.

 


“…난 이렇게 사람 많은데서 진하게 하라고는 허락 안 한 것 같은데.”

 


결국 미미가 먼저 빼는 걸로 코시로만 애가 탄 채 두 사람의 키스는 짧게 끝이 났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행복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미상, 저 엄청 기다렸는데 계속 애 태우기 있어요?”

“그래도 사람들 많은 곳에서 하기는 부끄러운 걸!”

 


다시, 두 사람에게 여름의 더위가 찾아온 듯 했다.

 

 

 

 


§

 

 

Hold my breath as you're moving in,
네가 다가오면 난 숨을 멈추고,

Taste your lips and feel your skin.
네 입술을 음미하며 네 살결을 느끼지.

When the time comes, baby don't run, just kiss me slowly.
그 때가 오게 되면, 도망치지 말아줘, 그냥 내게 천천히 키스해줘.

 

 


.

 


.

 


.

 


Fin.

 

 

 

 

 

 

 

 

 

 

 

*모든 글의 저작권은 월화비월(@Moon_m0406)에게 있습니다.

*재업(2015.04.12)

*수정(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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